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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양
마태복음 10:1~15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마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갈 것을 명령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지극히 마태다운 묘사입니다. 마태에게 예수님은 약속된 이스라엘의 왕이었으니까요. 유대인을 우선하는 마태의 태도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라도 민족감정은 있는 법이고 그것이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이 전할 메시지는 “천국이 가까웠다”(마 10:6)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야말로 천국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여 있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습니다. ‘담대하라’는 겁쟁이에게 주는 격려이고, ‘공부하라’는 놀기 좋아하는 아이에게 주는 압박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 사람보다도 더 천국에서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개만도 못하다고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보다 더 구제 불능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가까운 중국도 선교해야 하고, 이웃 나라인 일본도 복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여러 민족과 이번에 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튀르키예와 시리아도 선교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은 아닐까요? 한국기독교 144년(나는 한국교회 원년을 1879년 스코틀랜드 선교사에 의해 백홍준, 이응찬 등 4명의 조선인이 세례받은 때로 봅니다) 기독교 역사에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놀라운 성장과 부흥이 있었다고 자랑합니다. 천안인가에 ‘한국기독교기념관’ 이름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137미터의 예수상을 세운다고 하는 꼴이 한국교회 현주소를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나라가 된 이 나라에서 안타깝게도 정의는 조롱당하고 있고, 평화는 요원합니다. 증오를 부추기는 이들이 활개를 치며 전쟁 불사를 소리치고, 가난한 자의 집을 헐어 부자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정책이 막무가내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차별과 혐오가 난무하며, 노동자를 죽음으로 모는 작업환경은 여전히 위험천만하고, 역사를 되돌리려는 이들은 아예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일언반구도 반응이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은총의 나라이고, 축복의 현상입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먼 곳에 있으면서도 그 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144년 전에는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희망을 말하기에도 난감합니다. 교회 안에 똬리를 튼 종교 권력은 교회와 이 땅을 하나님 나라의 험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라면 이 땅에 희망없이 자라는 청소년과 고난에 처한 시민과 나그네와 미래세대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 말미에 세계 선교 명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는 일과 세계선교는 하나입니다.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너무 본류에서 멀어진 이 현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회복의 기회를 닫지 말아주십시오.
● 찬송 : 312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https://www.youtube.com/watch?v=97qgDhbm700
2023. 2. 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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