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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라는 사람들>
영어에서,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 중요한 의제를 논의하는 회의를 ‘시노드’(synod)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교회 공의회’(concilium/council)나 ‘교단’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이 흥미롭습니다. ‘함께’라는 ‘쉰’(συν)과 ‘길’이라는 뜻의 ‘호도스’(ὁδός)가 합쳐진 고대 그리스어라서,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5세기 이전 교회에선 이 단어를 특별한 의미로 사용했는데, ‘한 식탁을 나누는 사람들’, 즉 ‘성만찬 공동체’(교회)에 사용합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한 곳을 바라보며, 함께 그리스도의 식탁을 나누고, 같은 길을 걸어가며, 서로의 조각이 되어가는 길동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의사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니고, 경찰관도 아닙니다. 교회 밖에 나가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맹탕 목사입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억울하거나 급작스러운 일이 생기면 찾아오고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옵니다. 그리곤 애처로운 사연을 풀어놓습니다. 구구절절 풀어놓는 사연을 직접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쯤 교인들도 잘 압니다. 그래도 찾아옵니다. 왜 찾아올까요? 그냥 기도나 받고 심신의 안정을 취하려고? 그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어디서부터 일을 해결해야 할지 몰라 당황할 때 이렇게 찾아옵니다.
이때 저에겐 행동 수칙이 하나 있습니다. 병을 직접 고치지 못하니, 교인 가운데 의사 전화번호를 찾아 연결해 주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면 변호사를 찾아 연결해 줍니다. 어제도 급작스레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 관계가 참 오묘하더군요. 호소하는 교인, 목사, 일을 처리해준 교인. 이 셋을 이어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 유일한 열쇠는 교회라는 곳에 깃든 ‘신뢰의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목사에게 연락하거나 호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교인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목사인 저도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고, 부탁받은 교인도 행동에 옮기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신뢰의 관계가 모든 일을 처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뢰는 그렇게 서로 다른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이렇듯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의 몸, 하나로 섞임, 하나의 반죽이 되어가는 곳입니다. 그리스도가 가르친 말씀과 삶이 우리 가운데 안 섞이고, 하나의 반죽이 안 된다면, 거기서부터 교회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따귀를 맞았고, 희생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찬을 통해 우리에게 먹히고 뒤섞이고 혼합되길 원하십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성찬 공동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함께 밥을 먹고, 한곳을 바라보고, 손을 잡고, 광장에 나가 한목소리로 무언가를 외칠 수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께 걸어가는 길동무들에게 예수의 낮아짐과 섬김의 반죽 맛이 안 난다면 문제입니다. 큰 군중이 하나의 시노드가 되어 한목소리를 내며 희생을 각오한다고 한들, 거기서 예수 대신 특정한 인물이 도드라지거나 하나님처럼 숭배되고 높여지는 순간, 그건 예수 이름을 빙자한 사이비 집단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은 매번 흔들리고 의심하고 절망합니다. 목사라도 별수 없습니다. 땅 위에 사는 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 보다 그분의 부재를 경험하며 몸살 걸린 나를 잡아 세우는 건 언제나 성찬을 함께 나눈 이들입니다. 그렇게 천사처럼 곁을 지켜주며 말 걸어오는 교우들을 통해 ‘교회 공동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필요한지 새삼 깨닫고 배웁니다. 홀로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한 식탁에서 서로를 믿어주며,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다독여 주고, 손잡아 함께 걷는 이가 있기에 교회입니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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