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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은총 큰 책임
마태복음 11:20~30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본래의 목표에서 어긋난 행위를 총칭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상실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죄란 양심이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도덕적 결함, 또는 이기적으로 표출된 욕망입니다. 그런데 악을 행하는 죄도 있지만 선을 행하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흠결이 없어 보이지만 선에 동조하지 않는 행위 역시 죄입니다. 거지 나사로를 본체만체 한 부자의 죄가 그런 경우입니다(눅 16:19~31). 부자는 일생에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선의 기회를 놓친 셈입니다.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강진으로 고통 당하는 이들을 돕는 일은 선을 쌓을 기회입니다. 선을 행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외면하는 무위야말로 죄입니다. 거룩으로 위장한 죄, 위선이야말로 죄 가운데서 가장 치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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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메시아에 대한 증거입니다(마 11:5). 이런 기적들은 특히 갈릴리 주변에서 많이 행하셨습니다. 당연히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잘, 그리고 많이 알았다고 짐작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상대적으로 많이 체험하고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주님은 매우 분노하셨습니다. 경건주의 성경학자 요한 알브레히트 뱅겔(1687~1752)은 ‘신약의 독자가 구약의 독자보다 더 행복하다. 그러나 더 불행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빛을 많이 받은 자는 적게 받은 자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심판의 날에는 빛을 많이 받은 도시가 그렇지 못한 도시들보다 더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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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의 죄는 두로와 시돈과 소돔보다 큽니다. 이들 도시는 특권을 망각하는 일을 자행하였고, 메시아와 진리에 무관심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은 소돔과 고모라가 보지 못한 메시아를 대면하여 말씀을 듣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특권을 누렸으면서도 곧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판단할 때 어른의 기준에 맞추지 않듯이 특권이 클수록 정죄의 강도도 센 법입니다. 이들 도시는 메시아에 대하여 무관심했습니다. 극렬하게 반대한 것도 아니지만 열렬히 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에 대하여 무관심하면 심판에 이릅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신앙에 중립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 도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덕률을 어기는 행위만 죄가 아니라 아는 바를 실천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살인 행위만 죄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구조행위를 거부하는 일도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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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사는 이 도시를 둘러봅니다. 복음의 관문이라는 명예로운 자존감과 세속도시의 욕망이 맞물려있습니다. 국제도시라는 교만과 사회적 약자의 시름이 교차합니다. 크고 작은 교회는 많지만 복음이 더 힘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은총에 합당한 책임이 요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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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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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과거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 큰 도시에 다시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이 등장하게 하여 주십시오. 과거에 불었던 은총의 거룩한 열풍을 다시 일으켜주십시오.
● 찬송 : 272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2023. 2. 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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