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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6: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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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6장 1절-10절: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절-7절: 집주인이 소문을 듣기를 청지기가 누구의 집 재산을 허비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냐? 바로 집 주인이다. 주인의 재산을 청지기가 허비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청지기라 함은 집주인이 맡긴 대로 집 재산관리를 하는 직책이다. 정직하게 지혜 있게 관리를 해서 재산이 불어나게 하면 더 크고 좋은 것을 맡게 될 텐데, 그런데 자기 집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니 집주인이 얼마나 화가 났을까?
소문을 듣고 들은 대로 속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직접 청지기를 불러서 확인을 했다. 확인을 해 보니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에 청지기보고 ‘이제 우리 집에서 너의 일은 끝났으니 정리를 해 놓고 나가거라’ 했다.
청지기는 불의한 일로 쫓겨나가게 생겼으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나이가 들어서 땅을 팔 수도 없고, 집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다녔으니 온 세상이 자기의 얼굴을 다 알기 때문에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겠느냐?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사람이 사는 곳이면 다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이런 저런 말로 소문이 돼 나간다. 청지기의 안 좋은 소문만 나갔으니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의 종들은 주님의 집 청지기로서 주님의 집 재산을 세상으로 낭비하면 안 된다. 주인의 재산을 자기 집 재산처럼 자기가 축적을 하면 안 된다. 주님의 집에 덕을 세워야지 주님에게 고통을 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는 하나님 앞에 내가 할 일을 다 하고 양심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야 한다. ‘진리냐, 비진리냐’ 그것도 잘 모르면서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이 많고, 인인관계도 바로 못 가지고, 물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인색하고, 원수를 삼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양심이 아니다. 그런 경우 회개를 하든지, 회개를 안 한다면 그 교회에 다니지 못하게 된다. 다녀도 스스로 왕따가 되고 은혜를 못 받으니 결국은 스스로 시험에 걸려서 나가게 된다.
두 번째는 참 진리본질의 교회로 인정이 되면 순종을 해야 한다. 사람에게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다. 혹 직분을 정지당했다면 풀릴 때까지 겸손히 근신을 해야지 스스로 교만하여 고개를 든다면 이는 교회를 개인감정으로 생각을 한 것이니 교회 인도자는 그런 사람을 이방인처럼 내보내야 한다. 왜 그러냐? 진리신앙의 노선으로 생명 길 좁은 길로 가고 있는 성도들을 자꾸 유혹 미혹해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파당을 짓고 교회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구약에 누가 그랬느냐? 압살롬처럼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몸담고 있는 교회에서 편당을 짓는 무리가 있다면 교회 인도자는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 세상적으로 나가는 교회란다면 그런 사람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당을 지어서 어떤 문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잘 모른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날 경우 목사가 개인감정으로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고, ‘진리냐, 비진리냐’ 하는 면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 그런데 옳은 교회라면 인도자 목사부터가 세상성적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목사님의 가르침이 진리이치가 분명하다면 그건 옳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목사님의 사생활까지 배우려고 하면 안 된다. 얼굴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이 될 수는 없다. 똑같지 않다고 해서 비진리는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게 아니다.
‘진리냐, 비진리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말로써 주장성으로 자기 속의 사고방식이 나오게 돼 있기 때문에 가르치는 목적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진리의 깨달음대로 생활하고 있지만 그 사람에게 비록 미숙한 점이 있을지라도 그건 성장통이다. 이 성장통을 그 사람의 다인 것처럼 묵사발로 만들면 안 된다. 사람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 참을 줄도 알아야 하고, 인내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인내라 하는 것은 미래의 좋은 점을 생각하면서, 그 쪽 방향과 목적을 생각하면서 참는 것이 인내다.
네 번째는 교인이 다른 교회로 가겠다고 하면 보내줘야 한다.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이미 마음은 떴으니 가지 말라고 붙잡고 있어도 그 사람은 은혜를 못 받는다. 잡으면 교회 안에서 잡음만 자꾸 생길 것이니 결국 교회가 시험이 되고 만다. 목사님들은 교인이 가겠다고 하면 ‘가서 예수 잘 믿어라’ 해야 한다.
교인들은 언제든지 어디든지 이 교회로도 가고, 저 교회로도 간다. 그럴 때 다른 교회로 옮긴 그 교회 목사님보고 ‘누구 교인을 뺏어간다. 누구 교인을 뺏어온다’ 하면 안 된다. 어느 교회건 자기 교회 교인들 전부가 안 믿는 사람을 전도해서 모인 것이냐?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무엇이 마음에 안 맞았는지 와서 은혜를 받으면 되는 거다. 나중에 다 하늘나라에서 만나는 거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불러서 ‘주인에게 줄 빚을 많이 탕감해 주면 자기가 주인에게서 쫓겨나도 그들이 나를 무시를 못할 것이다’ 했다. 고민 끝에 그런 최후의 수단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빚진 자들을 불러서 ‘당신은 주인에게 얼마를 졌느냐?’ ‘기름 백 말이니이다.’ ‘빨리 앉아서 네 증서에 오심이라 쓰라.’ 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주인에게 무엇을 얼마나 졌느냐?’ ‘밀 백 석이니이다.’ ‘네 증서에 팔심이라 쓰라.’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더 축낸 셈이다. 이럴 수가 있는 거냐? 반대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은 그만큼 자기의 짐이 가벼워진 셈이다. 주인은 손해가 됐고, 빚진 사람들은 좀 가벼워졌다. 그러니 빚진 자들은 청지기를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이렇게 되면 집주인이 고소를 하면 이 불의한 청지기는 재판을 받아서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집주인이 자기의 재산이 손해가 났다는 말은 안 하고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게 일처리를 했다고 칭찬을 했다는 점이다. 이 주인의 마음을 어떻게 평하고 싶으냐? 우리교인들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을까? 교활한 청지기를 칭찬을 했으니 집주인이 바보가 아닐까?
예수님은 우리로 깨닫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하셨으니 우리는 반드시 깨닫고 가야 한다. 예수님은 바보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 속에서 주인의 마음이 좋게 드러나게 했다.
8절: 예수님께서 연이어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의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했다. 집주인이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한 그 목적과 수단을 보고 지혜롭다고 칭찬을 한 셈이다. 그렇다면 말세의 안 믿는 사람들과, 불의한 청지기와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말세에는 안 믿는 사람들이 성도들보다 더 지혜롭다? 불의한 청지기와 공통점이 무엇일까? 말하자면 이 세상의 아들들은, 이방 불신자들은 남의 것을 가지고 즉,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산천초목을 통해서 먹고 마시며 일반혜택을 받고 있지만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걸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자기의 노후대책에는 지혜롭다는 말이다. 머리가 그렇게 잘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은 세상에 자기의 노후대책을 두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삼자적 입장에서 보면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저렇게 노후대책을 하니 그들이 나를 볼 때 얼마나 미련하다고 생각을 할까? 그러면 믿는 자기의 노후대책은 어디 있느냐? 특히 목사님들의 노후대책은 어디 있느냐? 하늘나라에 있다. 그게 하나님의 종들의 세계다.
9절: 빛의 아들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인즉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불의한 재물이라는 의미가 도둑질도 되고, 사기 치는 것도 되고, 불법으로도 되는 불의한 재산이냐? 여기서 불의의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이 9절은 제자들보고 하시는 말씀이니, 빛의 아들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니 공갈이나 협박이나 도둑질이나 사기를 쳐서 얻은 그 물질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이 영적 부요가 아닌 육적 세상 부요관을 가지고 끌어 모은 그 재산은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이 하나님의 것을 쓰는데 있어서 그들은 다 하나님 앞에 불의이지만 예수님은 그 재물로 친구를 사귀되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데 쓰라는 말씀이다.
예를 들면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 세상 누림의 목적을 가지고 재산을 막 끌어 모았다면 이건 불의한 재산이다. 즉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 재산이라.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에는 그 재산을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데로 쓰라는 것이다.
그러면 친구를 사귀되 어떤 친구를 사겨야 영원한 처소로 옮겨줄까? 우리는 이 세상의 물질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는데,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 화투 치는 친구? 술 담배 먹는 친구? 사기꾼 친구? 세상 노후대책 잘 세우는 친구? 예수라는 친구? 예수를 따르는 성도들? 예수 믿는 사람이 친구가 많은데 이 중에 어느 친구가 좋은 친구냐? ‘현재까지 자기의 물질을 가지고 어느 친구를 사귀는 쪽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면으로 자기 삶을 쳐다보면서 답을 해야 옳은 거다. 어떤 친구를 사겨야 영원히 내가 살 곳으로 인도가 되겠느냐?
‘없어질 때’ 라고 했는데 무엇이 없어질 때이냐? 내 수명이 다할 때. 그 때 나는 신령천국으로 영접돼 들어가는 거다. 이것이 빛의 아들들의 노후대책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노후대책을 세상에 쌓아놓는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은, 성도들은 그걸 구원에 이용한다. 낭비가 아니고 쓴다. 그게 노후대책이다. 안 믿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반대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말하자면 영원한 친구를 사귀는 그 쪽으로 물질이 쓰이는 것보다 세상놀이 쪽으로 얼마나 거금을 들여서 낭비를 했느냐? 주님을 사귀기 전에, 또는 이때까지 살아온 자기의 허점을 발견하고 ‘앞으로 내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회개하는 면으로 돼 나가야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노후대책이 어디 있는지? 주님은 이 땅에 노후대책을 해 놓았느냐? 노후대책이 없어서 33세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죽은 것이냐?
성도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일반사람들과는 달리 특수다. 그런데 세상에 워낙 절여 있으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이냐, 믿음이냐 신앙이냐’ 하는 면에 대해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게 된다.
집을 사는 것도 자기 분수 것 사야 한다.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을 생각하면 된다. 사람 몇 명 안 되는데 무조건 큰 집을 사 놓으면 그 집을 관리하는데 얼마나 돈이 들겠느냐? 돈이 자기를 위해서 계속 솟아 나온다면 몰라도.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법이 바뀔 때는, 그리고 자기 몸이 아플 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성경에 보면 ‘예수 믿는데 최소한의 먹고 마시고 잘 곳이 있은즉 족하도다’ 라고 했다. 이 말이 거지처럼 살라는 말은 아니다. 먹고 마시는 면에 해가 될 정도로 집으로 돈이 다 들어간다면 이게 무슨 꼴이냐? 빚을 내서 큰 집을 샀다고 하면 그 빚을 갚으려면 이자가 얼마냐? 그걸 다 갚기까지는 자기 몸도 안 아파야 하고, 직장에서도 안 떨어져야 한다. 그럴 자신이 있느냐? 남은 다 떨어져도 자기는 안 떨어지려고 하니 갖은 수법을 쓰게 된다.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한 말씀을 글자 그대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부자청년과 같은 그런 신앙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질을 쓰면서 물질을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물질에 탐을 내는 것이 아니라 천국복음에 지혜롭게 쓰라는 것이다. 그런데 글자대로 실천 실행하라고 한다면 이건 육의 생각이다. 육의 생각을 신앙처럼 본다면 절간의 중들이 신앙이 더 좋은 것이다.
10절: 주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것에 충성이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다. 이 자에게는 큰 것을 맡길 가능성이 있다. 마당을 쓸 때 수수 빗자루로 쓸다가 그 일에 충성했으니 대나무 빗자루를 주게 되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 했는데 그러면 큰 것도 있다는 밀인데, 큰 것은 무엇이냐? 여기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어떤 것에 충성치 못한 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치 못한 자.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서 영능의 실력적 천국의 누림을 염두에 두시면서 하신 말씀인고로 지극히 큰 것에 마음을 쓰라는 말이냐, 작은 것에 마음을 쓰라는 말이냐? 작은 것에. 그런데 세상 일반사람들은 큰 것에 눈독을 들인다. 지극히 작은 것에는 신경을 안 쓴다. 큰 것에 욕심을 낸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해 알아야 하느냐, 지극히 큰 것에 대해 알아야 하느냐? 작은 것. 그런데 ‘작은 거 그까짓 것’ 한다.
‘지극히 작은 것’ 할 때 지극히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이란다면 시력이 좋은 눈이고, 보는 것마다 정확히 구별 분별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는 큰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지극히 작은 것이란 없는 것이냐, 있는 것이냐? 있는 것이다. 있기는 있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잘 안 보여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거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그까짓 것’ 하며 우습게보고 그냥 방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걸 성령의 눈으로 보면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는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세계로부터 나왔다. 이 영적 실상세계가 무한히 큰 것인데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지극히 작은 것처럼 눈에 안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을 더 크게 여기지 천국은 눈에 안 보이니까, 작게 여기거나 안 보이는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말씀을 어기고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말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위주로 산다는 것이다.
세상은 크게 보이고 영의 세계는 작게 보이고, 그래서 진리 한 이치 한 이치를 놓치는 그 정신을 가지면 영능의 실력이 언제 커지겠느냐? 진리 한 이치 한 이치를 놓치는 그 정신을 가지면 언제 신앙실력 믿음실력이 커지겠느냐? 밥을 먹을 때 밥 한 술을 무시해서 안 먹는다면 언제 자기의 배가 불러질까? 천리 거리도 한 걸음을 떼면서부터 갈 수 있는 거지 ‘이까짓 한 발자국’ 하면서 안 간다면 언제 가지느냐?
세상이치는 그렇게 잘 알면서 신앙 믿음이 높은 차원이 오르는데 있어서 한 계단 한 계단을 무시하고 오를 수 있는 것이냐? 매일 매일,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들을 때 한 이치 한 이치를 깨달아 올라가야 영능의 실력자가 되고, 꼬리가 안 되고 머리가 되는 법이지 그런 마음이 없이 교회에 다닌다면 그게 뭐냐? 하나님이 자녀가, 빛의 자녀가 세상은 아등바등 욕심을 내면서 말씀을 무시하고 다닌다면 그런 사람이 세상일은 머리를 써서 잘 하겠느냐? 정신이 썩었는데.
진리 한 이치 한 이치마다를 놓치는 불의한 자가 큰 것에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냐? 못 한다. 큰 것에 충성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기본자세가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성이 들어있다. 지극히 작은 것의 충성의 본질은 큰 것을 맡을 수 있는 본질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큰 것을 맡을 적격자가 안 되는 것이다.
진리 한 이치 한 이치의 깨달음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영적인 이치를 부정하는 자이다. 일반적으로도 학생이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공부 하나 하나를 귀담아 들으면 그게 축적이 된다. 믿음의 사람은 지극히 작은 것에도 구원으로 충성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지만 불의한 사람은 즉,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해 옳은 것임에도 무관심 하는 자이다.
작은 것은 불충하면서 큰 것에는 충성하겠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사람이 큰 것에 더 충성심이 들어있고, 지극히 작은 것에 믿을 수 없는 불의한 사람은 큰 것에 더 불의한 것이다.
자기 부모를 때리는 자가 하나님을 잘 공경할까? 사람이 하나님을 잘 공경하느냐? 이 사람은 웃어른을 잘 공경한다. 부모님을 통해서 하나님 공경하는 것을 실습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하나님 공경하는 것이 모범으로 안 돼 있다면 그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겠느냐? 자식이 불효하는 것의 원인은 자식에게서가 아닌 부모 자기에게서 찾아야 한다.
한 주일 한 주일 빼먹기를 예사로 여기는 사람은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되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거짓 종이요, 지극히 작은 것부터 하지 않고 큰 것에 욕심을 부린다면 이는 헛된 망상이다. 지극히 작은 것부터가 아니면 그 사람은 커지지를 않는다.
신앙 영적 면에서나 물질 면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 사람은 큰 것에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충실한 자는 큰 것에도 불충실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작은 자로 보이지 않으면 큰 것을 맡아봐야 사람을 죽이게 된다.
사람에게나 모든 면에서 이치적으로 바로 생각을 해야지 세상 육적 인본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산다면 자기 살아생전에 얼마나 잘 살 런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과는 못 사귄다. 우리는 성경을 놓고 모든 사물을 생각해야지 성경을 치우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사고로 사물을 생각하면 안 된다. 어느 게 믿는 사람의 태도고, 믿음의 정신이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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