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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의 나라
마태복음 12: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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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1954)은 비행기가 추락하여 무인도에 불시착한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아이들은 순수했습니다. 그런데 무인도라는 상황에 적응하면서 숨어있던 야만과 광기가 드러나 갈등과 분열과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이후 전개되는 사냥과 약탈과 파괴는 권력화한 인간 추락의 종점이 어디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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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한 유형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랄프와 야심가 잭이 무리를 이끌지만, 민주적 대장 선거에서 잭이 이깁니다. 선과 악, 또는 정의와 불의의 싸움에서 항상 선과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지도자의 등장에 필연적인 논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봉화에 불을 피워 구조를 기다리자는 랄프와 식량 마련을 위해 사냥을 우선해야 한다는 잭의 논리가 이분법처럼 부딪힙니다. 무인도에서 나갈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과 먹고 사는 문제가 먼저 할 중요한 일이라는 현실 인식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존재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단언하고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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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은 쥘 베른의 『15 소년 표류기』와 비슷하면서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1984』를 닮은 소설로서 디스토피아의 어두운 사회에 대한 우려를 자아냅니다. 산업혁명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룬 영국에 깃든 불평등한 계급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풍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악의 본성을 제어하지 못하는 한 사회는 언제나 파리대왕의 나라일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작은 무인도 아이들만이 아니라 산업혁명으로 인류사의 쾌거를 이룬 영국의 모습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이 나라의 현실이 그렇고, 오늘 이 세계의 질서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세속 사회와 그 구성원으로 사는 인간 구원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 나라를 표방하는 교회마저도 파리대왕의 놀이터가 된 것은 아닌지 적이 의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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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을 힘입은 행위’라고 공격합니다. 바알세불은 ‘큰 집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귀신의 왕 사탄을 말하는데 그 명칭이 ‘솔로몬을 연상시킨다’하여 ‘바알제붑(Ba‘al Zebûb)’이라고 바꾸어 부르기도 하였습니다(왕하 1:2). 바알제붑은 ‘파리의 왕’입니다. 파리의 왕을 제압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증거입니다. “사람이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 어떻게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있느냐?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수 있다”(마 12:29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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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치유 받았습니다. 『파리대왕』에서도 아이들은 어른들에 의하여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권력욕에 취해 증오와 광기의 칼춤을 추는 이 시대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과연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도리어 구원이 가장 시급한 곳은 교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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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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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파리대왕에 사로잡힌 이 세상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오늘 저희에게 구원의 주님을 보여주시고, 주님 따를 믿음과 용기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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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357 주 믿는 사람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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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 19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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