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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1. <지렁이의 기도>에서 간단히 언급했지만, 나는 1999년 6월 8일 저녁에 깊은 성령의 임재와 은사를 체험했다.
사실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니, 전혀 원치 않던 일이었다.
그날 나는 오후 내내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그냥 기분이 안 좋은 것이 아니라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알량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날 첫 아이의 임신 7개월 차에 접어든 아내의 정기 검진이 있어 병원에 함께 갔다가, 의사에게 넌지시 "아이의 신발을 분홍속으로 살까요, 파란색으로 준비할까요?" 물었다가 "그런 쓸데 없는 질문은 왜 하냐?"는 면박을 당하고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날 나는 오후 내내 "지가 의사면 다야? 파란색과 분홍색 그 세 마디를 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하며 툴툴거렸다.
그러다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권면한 내용이 생각났다.
화가 났을지라도 해가 지기 전에 노여움을 풀라는 말씀이.
그래서 혼자 서재로 쓰는 작은 방에 들어가 기도하려고 엎드렸다가 순식간에 강력한 성령의 임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너무나 강렬한 체험이었다.
책에서만 봤던, 혹은 그런 체험을 했던 사람들에게서만 전해 듣던 일이 내게도 일어났던 것이다.
2. 그 일이 일어난 1999년 6월 8일 이후 나는 거의 100일 동간 매일 최소 8시간 이상씩 기도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매일 같이 별의별 신기한 체험을 했다.
그런 체험들이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나는 더욱 기도에 힘썼다.
그때 기록한 일기장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가끔씩 그 내용을 들춰보면 그 희한한 체험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때가 내 나이 32세 때였다.
3. 그 일이 있고 나서, 나의 목회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한 마디로 '신기한' 일들이 흔하게 나타났다.
그러자 여기저기 소문이 났다.
부흥회나 수련회를 인도해달라는 부탁도 잦아졌다.
내가 어느 교회의 수련회나 부흥회를 인도하고 나면 그야말로 '뒤집어' 지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한편, 내가 성령을 받았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지자, 신학교 시절부터 나를 잘 알던 선후배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요한은 성령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그렇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 성령을 받는다는 게 말이 돼?"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나는 의도하지 않게 성령의 강력한 은사를 체험했고, 30대 내내 매일 최소 3시간에서 5시간씩 기도를 하며 살았다.
4. 나의 기도 생활은 40대에도 이어졌다. 40대에도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최소 3시간씩 기도하는 시간을 빼먹지 않았다.
여전히 신기한 체험이 이어졌고, 기도의 열매도 많았다.
50대가 되니 예전처럼 많이 기도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일단, 체력적으로 부담이 커졌다.
그래서 지금은 매일 평균적으로 2시간 정도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한다.
5. 32세 때 되던 6월에 강력한 성령 체험을 하기 전에도 나는 기도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심지어 20대 초반, 그러니까 군사독재 시절에 학교를 다니면서도, 데모하러 나가기 전에 꼭 채플 실에서 혼자 기도를 하고, 데모가 끝난 후에도 혼자 채플실에 들려 기도를 했던,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32세 때 경험한 특이한 영적 체험들은 나의 기도생활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변화시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32세 때부터 계산해서 지난 25년간 어쨌거나 나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여, 혹은 성령의 은사를 통해 지속적인 기도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6. 지난 25년간 꾸준히 기도를 해오면서, 적잖은 변화가 내게 일어났다.
첫째, 은사의 강렬함 면에서는 확실히 예전보다 지금이 못하다. 30대에는 기도만 하면 별의별 기적이 일어났는데, 요즘은 뜸하다.
둘째, 그렇지만 지금은 기도를 하면서 어떤 신기한 체험을 하거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쉽게 말해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
셋째,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내가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긍휼의 마음이 훨씬 더 깊어지고 있다.
넷째, 더불어 갈수록 기도를 하면서 눈물이 많아지고 있다. 나의 기도의 결정체는 '눈물'이다.
7. 지난 25년간 기도 생활 중, 성령을 강력하게 체험했던 첫 100일의 시간, 곧 어떤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매일 8시간씩 기도에만 전념했던 시간들 외에, 거의 대부분의 기도 생활은 사실상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특별히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성실한 기도 생활은 곧 나 자신과의 지독한 투쟁을 의미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매일 밤마다 회사에 다시 출근해서 기도하기 전에, 오늘은 너무 피곤한데 그냥 쉴까, 오늘은 그냥 재밌는 드라마를 볼까, 오늘은 아직 일을 다 못 마쳤는데 일단 일부터 끝내야 하지 않을까, 등등 수많은 갈등과 씨름하면서 '억지로, 억지로'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온다.
물론 이렇게 어렵사리 기도의 자리에 나와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어느새 큰 평안과 기쁨에 사로잡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기도를 하게 되지만, 그러나 기도의 자리에 나아오기까지는 매일 똑같은 갈등을 한다.
나는 젊은 시절에는 내가 꽤 강한 사람인 줄 알았다.
나는 내 자신이 어떤 사람과 비교해도 의지나, 정신력이나, 투지가 모자라지 않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내가 참 연약한 사람인 것을 매일 절감한다.
나는 30대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투지와 의지를 앞세워 기도에 힘썼지만, 지금은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가 빨리 응답이 안 되서 속상하고 서운하다는 핑계로 기도의 자리를 비울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
나는 내가 이렇게나 연약한 자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연약함을 극복하고자, 매일 같이 나 자신과의 엄청난 싸움을 하면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간다.
8. 기도는 어떤 아름다운 설명이 아니고, 화려한 묘사도 아니다.
기도는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며, 따라서 격렬한 몸짓이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미국에서 일어나는 기도 운동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당장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먼저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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