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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정의
마태복음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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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자입니다. 물론 의로워서 의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죽음으로 예수님의 의가 전가되어서 의인입니다. 그 과정에 믿음의 역할이 있습니다. 교리에서는 이를 칭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인정받았다고 해서 정말 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어제 저지른 죄를 오늘 반복하고, 하루하루 나아지고 진보하기보다는 어제보다 못한 오늘을 사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나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세상을 초월한 듯하다가도 어떤 때는 사소한 자존심 하나로 속상해하고, 버리지 못한 욕망 때문에 힘겨워 할 때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이렇게 형편없는 나같은 이를 의인이라고 칭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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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신분에 대한 호칭입니다. 낙제가 없는 의무교육 제도 아래에서는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면 중학교에 갑니다. 중학교 학업 진도를 따라갈 능력이 있어서 중학교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학업 능력은 중학교에 들어가서 씨름할 문제이지 그것 때문에 중학교 입학이 불허되는 것은 아닙니다. 곱하기 나누기를 능숙하게 못하더라도 중학생이 됩니다. 인수분해를 잘하지 못해도 고등학생은 됩니다. 물론 대학의 경우는 다를 수 있습니다. 대학은 의무교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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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중학생이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다면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다면 매우 걱정됩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신분으로서의 의인과 수준으로서의 의인의 차이가 클수록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격차를 최소화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천당 신학’(‘천당 신학’이란 기독교의 가르침을 죽어서 천당 가는 것쯤으로 가르치는 신앙을 이르는 말입니다)은 그런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천당 신학’과 ‘천국 신학’은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 신학’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시화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의식을 전제합니다. 민주적 질서와 공공의 가치와 윤리적 삶을 존중합니다. 천국 입장표인 칭의를 사회적 정의로 살아내려고 노력하며, 그리스도의 화목을 인류애에 기반한 평화로 번역하려고 애씁니다. 구원에 이르는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일수록 그에 걸맞는 수준을 강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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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이 결국 세례자 요한을 참수하였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요한은 동생 필립의 아내를 취한 헤롯을 책망하였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어 감옥에 갇혔고, 결국 한 계집아이의 춤값으로 죽임당하였습니다. 정의가 죄가 되는 불의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처음 왕 사울은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이 망명자 신세가 된 다윗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85명의 제사장을 죽이고 놉의 남녀 주민과 어린아이, 그리고 가축들을 칼로 쳤습니다(삼상 22:18~19). 그런 일은 역사에 수없이 많았고, 지금 이 땅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죄를 물을 수 없는 일에 과도한 죄를 묻는 양아치 같은 헤롯의 후예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 치고 있습니다. 불의가 정의를 능욕하는 시대에 믿음을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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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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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칭의’와 ‘정의’의 격차가 큰 세상살이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주님의 의를 실천할 믿음과 용기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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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516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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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 26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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