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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면서 전쟁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의 선전선동에 속은 어리석은 민중들은 조국을 위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갔다. 20세기 전반의 민중들은 그렇게 선전선동에 속아서 전쟁터로 달려갔다. 그 이후에도 다를 것은 없다.
역사를 사대냐 자주냐의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 그것은 권력을 가진 왕이나 귀족들의 관점이다. 오늘날 역사를 보는 지식인들도 많은 경우 그러한 관점에서 역사를 본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그 때 그 당시, 먹거리를 하늘로 알고 사는 일반 백성들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좀 비굴하면 어떠랴? 왕이나 귀족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 다른 나라에 비굴하게 무릎 꿇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마치 아비가 처자식을 살리기 위해 모진 고생과 수모를 감수하는 것처럼 말이다.
식민사관이란 우리민족이 한없이 못났다고 하는 것이다. 민족사관이란 우리 민족이 한없이 잘났다는 것이다. 어느 역사든지 못난 부분만 들추어 보면 한없이 못난 것, 잘날 부분만 들추어 보면 한없이 잘난 것. 잘난 것도 뒤집으면 못난 것, 못난 것도 뒤집으면 잘난 것, 그러니 민족사관이다 식민사관이다 하는 것은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맘보를 어떻게 먹느냐는 보따리의 문제이고 어떻게 보냐는 눈깔의 문제다. 무엇보다도 역사는 그때 그 당시의 형편에서 필요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한없이 쭈그러져 있고 자존감을 잃고 소망을 잃은 시대에는 힘을 주어야 할 것이요 한참 잘나가고 있을 때는 경종을 울려야 한다. 과거의 악행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타협 없는 완고함이 세상을 망친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완고함이 학문의 균형발전을 가로막았다. 소련 공산주의도 이데올로기적 타협을 몰랐다. 그래서 망했다. 이제까지 우리는 뿌리 깊은 반공, 타협 할 줄 모르는 반공이데올로기로 위험을 자초해 왔다. 한국 기독교역시 타협 할 줄 모르는 배타성으로 스스로를 고립시켜왔다.
나는 역사를 “과거를 거울삼아 현실을 보고 미래를 대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를 대처하는 것’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미래학이다.
현대사는 참 어렵다. 과거사는 현대라는 결과가 있고 거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데 현대사는 결과가 없다. 결과를 예측해야 한다. 그리고 무수한 변수들이 언제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그래서 어렵다.
세계가, 한반도가 –언제나 그랬듯이 – 격동이다. 무수한 변수들이 어떻게 작용할지가 염려된다. 나는 권력 판도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먹거리를 하늘로 알고 살아가는 이 시대 민초들이 전쟁위험이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한 희망이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周易(주역)에 이르기를 “窮卽變, 變卽通, 通卽久 是以 自天祐之(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장구하다. 이것이 하늘이 돕는 것이다)”-<주역>, 계사하 2장-
사람들은 窮卽通(궁즉통)만 알지 自天祐之(자천우지)를 모른다. 분명히 보이는 글을 왜 알지 못할까?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궁하게 하는 것, 변하게 하는 것, 통하게 하는 것, 영원하게 하는 것 이 모두가 하늘이 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돕는 것이다.
김홍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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