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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시대 인식
마태복음 16: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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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내가 사는 이 시대를 향하여 던지고 싶은 질문이 많습니다. 3.1운동 기념식에서 일본을 ‘협력자’라고 대놓고 민족의 가치를 부정하는 연설을 하는 이 나라가 마뜩찮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미래 지향의 관점에서 이웃 나라를 부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의연한 역사를 폄훼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생명과 재산과 젊음을 바쳐 민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이들의 정신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비슷한 국난이 닥치면 무슨 명분으로 민족애를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와 미래를 위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저급한 이가 협력과 미래를 운운한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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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의미 조차 분명하지 않은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가 유동성의 좌표 개념인데도 고정 이념으로 인식하는 풍토에서 말이 통하는 선생과 벗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쩌다 그런 이를 만나더라도 자기 의와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혀 곧 식상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래서 16세기 분란의 시대에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던 에라스뮈스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현실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점이 무척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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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는 상식의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상식에 터하는 사회 원리입니다. 지성과 철학과 도덕에 터한 상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지와 법사와 미신과 무당과 힘의 논리만 있습니다. 법 정신은 사회적 약자 보호입니다. 백 명의 도둑을 잡지 못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시민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 법은 힘 있는 자의 노리개가 되어 버렸습니다. 상식의 가치를 이만큼 세우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세월과 피나는 노력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런 난국에서도 무지한 종교는 칼춤을 추며 홍위병 역할을 자임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심합니다. 먹고 살기에 바빠 무관심합니다. 개 돼지가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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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더 궁금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어떤 시선으로 보셨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과연 주님은 로마에 의해 헤롯의 아들들이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시대를 어떻게 보셨을까요? 희망을 말하기에 절망이 너무 가까이 있어 옴짝달싹 못하는 백성이 살아내야 할 세상에 대한 주님의 시대 인식이 궁금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16:4 a). 아, 주님은 그 시대를 악하고 음란하다고 보셨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시선으로 이 시대를 본다면 ‘악하고 음란’할 뿐만 아니라 ‘저급하고 유치한 세대’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의 시대 인식은 해결책도 동반하고 있는데 바로 “요나의 표적”(16:4 b)입니다. 요나의 표적이 악하고 음란한 시대를 이길 유일한 대책으로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시대 문제의 해결책을 갖고 있기나 한가요? 맘몬 숭배에 빠진 교회가 망하는 길 말고 뭐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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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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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하나님 나라 가치를 고집하고 그 질서를 이제 여기에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시대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그 좁은 길을 견지하겠습니다. 믿음과 용기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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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449 예수 따라가며 https://www.youtube.com/watch?v=t9PtqaEAL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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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 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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