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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계2: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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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계 2장 12절-15절.
12절-13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편지란 성경을 말한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주님이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고 나왔으니 이쪽저쪽을 닥치는 대로 치는 거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사단의 위’란 교회의 사자가 거처하고 가지는 사상의 자리를 말한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안디바가 사단의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데도 버가모 교회의 사자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사단이 교인들을 통해 안디바를 죽인 거다. 칼로 죽인 게 아니라 정신과 사상적으로 죽인 거다.
안디바가 사단의 위가 있는 곳에서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서 믿음 좋은 안디바가 그런 곳에 있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며 안디바와 안디바를 죽인 사람을 안 좋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이런 각도로 보면 안 된다. 버가모 교회만 아니라 계:에서 일곱 교회에게 하는 말은 주님의 사자, 즉 종에게 하는 말이니 자신이 목사라면 ‘내가 안디바를 죽였구나’라고 해야 한다.
사단의 종은 교인들에게 주님의 성품을 입게 인도하지 않고 ‘왜 충성봉사를 안 하느냐?’라고 한다. 그러면 교인들은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목숨을 바쳐서 충성봉사를 한다. 이런 목사와 교인들은 안디바나 안디바를 죽인 사람을 탓하지만 그게 아니라 자신을 고쳐야 한다. 온 교인이 충성봉사를 하면 물질적 확장이 되고 예배당을 크게 짓게 된다. 그러나 온 교회가 이렇게 나가면 인격적 실상이 주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안디바의 사건을 성경에 기록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목사 너는 지금 교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 하고 묻는 거다. 설교 속에는 사상이 들어있으니 설교의 내용이 천국의 사상이 아니면 세상의 사상이다. 그래서 이걸 쪼개보자고 주님께서 좌우에 날 선 검을 입에 물고 나타나신 거다. 말씀으로 설교의 사상을 쪼개보자는 거다. 칼이 안 들면 자르려고 하는 물체가 뭉개져 버린다.
설교는 정신이나 마음이 어디에 사는 건지, 어디에 앉아있는 건지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설교는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서 제 자리에 앉게 하는 거다. 위치적 순위적으로 ‘하나님-->인간-->물질’의 순서로 살게 하는 거다.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는 것은 말세가 되면 믿는 사람은 많은데 대부분이 ‘하나님-->인간-->물질’의 순서로 살지 않고 물질이 자기 위에 있고, 하나님께 이 물질을 달라고 하는 신앙정신을 가진다는 거다. 말씀이 와야 자기 마음이 어디에 앉아있는지 알 수 있다. 말씀이 와서 자기의 마음과 정신을 쪼개야 믿든지 안 믿든지, 도망을 가든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든지 하는 거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보신다. 설교하는 사람의 사상과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마음을 보신다. 그러니 교회의 사자나 종은 영적인 면에 눈이 밝아서 생명운동을 해야 한다. 사망운동을 하면 죽는다. 그런데 자기가 사망운동을 하면서도 밥 먹고 숨 쉬고 살고 있으니 사는 것으로 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교회에서 충성할 때 목사를 잡고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잡고 하는 거다. 목사가 예수이름으로 설교를 하지만 육적인 정신으로 한다면 이런 목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해타산이 들어가기 때문에 종교적인 열심을 내고 유형적인 이루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며 교회를 무당이나 점쟁이 식으로 인도한다.
14절-15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란 사기꾼이나 무당이나 점쟁이나 복술자를 말한다. 이런 자들은 예수이름을 가지고 성도들이 이룰구원을 이루며 가는, 천국으로 가는 발걸음을 죽인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우상’이란 안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하나님처럼 의지하는 거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물질적인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발람의 꾀에 넘어간 거고 우상을 섬기는 거다. 오늘날 발람 같은 목사가 많다.
‘행음’에는 육적 정신적 행음과 영적인 면의 행음이 있는데, 영적인 행음은 자기의 신앙정조를 예수이름으로 세상에 파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신앙정신을 세상에 팔고 세상 소원 목적으로 살면 창녀 짓이 나오게 된다. 자기 마음중심에 세상성이 들어있으면 현재적으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아서 그런 짓을 안 할 뿐이지 여건만 조성이 되면 그런 짓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기의 현실이 극도로 어려워지면 몸으로도 창녀 짓을 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가 계:에 나타나는 정신세계의 활동을 못 본다. 그러니 이단도 모르고 거짓 종도 모른다. 안다면 하나님의 인도대로 애굽에서 탈출했을 거다. 거짓 종도 성경을 쓴다. 발람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발람은 세상정신을 가지고 예수이름을 나타내자는 수법을 쓴다.
목사라면 계:을 풀 줄 알아야 하고, 성경은 교인을 향한 게 아닌 목사 자기를 향해 말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목사가 자기의 신앙정신이 사단의 자리에 앉아있는 건지 모르고 있다면 큰일이다. 성경에 안디바의 사건을 기록해서 미리 가르쳐 주는 것은 그런 곳에 가지 말라는 거다.
믿는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성경을 들고 성령의 감화로 살아야 한다. 자기의 정신이 세상 이해타산으로 되어있으면서 ‘진리 진리’ 하면 뭐 하느냐? 우리는 예수 믿는 게 자기에게 실질적 효력이 있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자기의 속을 밝혀주면 ‘내가 이 면이 잘못됐구나. 고쳐야지’ 하게 된다. 자기가 잘못된 것을 알면 서서히 고쳐나가게 된다. 성령님의 역사는 자기를 서서히 고친다. 자기 속에 거룩한 영의 역사가 있으면 자기가 고쳐진다. 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찬 것은 이것을 말하는 거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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