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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산수
마태복음 18:11~20
기독교는 내가 선택한 신앙의 여러 갈래 가운데 한 가닥이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나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기독교 말고 내 영혼의 닻을 내릴 곳은 없었습니다. 다행히 신앙의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지 않아 눈앞의 빛을 따르다 보니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늘 경건하고 모범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내 속에는 여전히 신앙의 인력을 거부하려는 사악한 생각이 늘 꿈틀거려 처절한 싸움이 일 때가 많습니다. 어제 한 실수를 오늘 다시 반복합니다. 매일 성경을 붙잡고 사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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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18:12~13). 내가 철들고 나서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하나가 아흔아홉 못지않게 귀하다는 가르침 앞에 나는 두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기독교에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놀랍습니다.
사악한 적들이 여자들에게 ‘너희 모두를 욕보이기 전에 너희 가운데 하나를 보내라’고 할 때 단호하게 거부할 줄 아는 용기를 가르쳐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가르침도 이에 터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산수를 하는 방식이 세상과 다릅니다. 주님은 그 방식으로 살라고 우리를 종용하십니다. 주님의 방식을 따르면 세상에서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결국 주님의 방식을 포기하고 세상 방식을 따릅니다. 부동산 투기, 과도한 주식 투자, 비트코인 등 세상 방식과 동일하게 삽니다.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 복이라는 맘몬의 기복주의 교회 부추김도 한몫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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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소자 하나를 돌보는 일이 견강부회한 것이 아니며 매우 특별한 일도 아님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십니다. 남은 양떼에 비하면 잃어버린 한 마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목자는 그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아흔아홉 마리를 기꺼이 방치하였습니다. 많은 양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심정으로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이 바로 예수님의 심정이며,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이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양을 항상 찾는 것은 아닙니다. 맹수의 먹이가 될 수도 있고, 골짜기에 빠지거나 먼 곳으로 가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찾으면’ 목자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8:14). 일상에서 작고 하찮은 자의 권리가 지켜지고 그들의 삶이 민망해지지 않도록 하는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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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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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우리 사회에 작은 자의 삶의 자리가 날로 좁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책임입니다. 천국의 산수를 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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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37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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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 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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