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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4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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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4장 42절-49절: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42절: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사마리아 사람들이 처음에는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나왔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이틀 동안 말씀을 듣고 보니 반석 위에 세워진 확실한 믿음이 되었고, 예수께서 세상의 구주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신앙이라야 세상에서 건져진 거다.
예수이름을 가지고 세상 것을 구하고 있으면 이건 세상에서, 죄에서 건져진 게 아니다. 인간 자기의 위에는 하나님이 계셔야지 물질성적인 세상을 올려놓으면 이 사람은 죄 아래 사는 거다. 순서적으로 하나님 다음이 인간 자기인데, 자기 위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올려놓으면 죄다. 그 무게로 인해 자기는 점점 고개가 숙여진다.
43절-44절: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이틀 동안 사마리아 고을에 계시면서 그들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도록 하신 후에, 즉 세상의 구주심을 알게 하신 후에 그곳을 떠나 갈릴리를 향해 가셨다.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선지자가 하는 말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인간 자기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대로 바로 살도록 가르쳐 주는데 고향사람들은 이 말을 혈통과 인정정실을 기준 삼아서 듣는다. 선지자는 신령천국과 영에 속한 것을 전하는데 고향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소원 목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전하는 말을 안 받는다.
선지자가 과거에 자신들과 함께 살던 때를 생각해서 동기간이나 인정정실이나 혈육적으로만 대하기 때문에 가치판단 평가성적으로 선지자를 알아주지 않는다. 말씀의 고귀함을 알아주지 않는다.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아주지 않는다. 이런 곳에는 말씀이 안 들어간다. 선악과 먹은 소원 목적을 가진 자들은 생명과 먹은 소원 목적은 안 알아준다. 듣기 싫으면 환난 핍박을 주고 죽이는 일까지 한다. 그러니까 이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신앙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한 가정에서 목사가 나오면 자기 집안 식구는 선입관이 있어서 목사의 교훈이 잘 안 들어간다.
사람이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게 시간 속에 속한 것이라면 그 말을 믿으면 안 된다. 가령 돈을 빌리면서 언제 갚겠다고 약속을 하다면 그 돈이 천국에 속한 거냐, 시간에 속한 거냐? 시간이다. 그리고 이 사람 역시 시간에 속해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변하는 세상에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떤 약속을 할 때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지라도 시간에 따라, 환경과 조건에 따라, 자기의 형편에 따라 그 약속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거다. 이런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 시집장가를 가는 것도 시간적 물질적인 것에 등을 기대서 하다가는 얼마 못 가서 도통이 난다.
사람 간에 신뢰가 중요한데, 우리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받지 않을 생각으로 빌려주고, 꼭 받을 생각이라면 문서로 근거를 남겨라. 이건 약속을 어기면 법으로 해결하려는 거다. 믿는 사람끼리 ‘예수 믿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랴’ 라고 하면서 빌려줬다가는 큰 코 다친다. 빌려주려면 안 받을 생각으로 빌려주고, 받을 생각이면 문서로 약속을 단단히 하고 빌려줘라. 그리고 돈을 빌린 사람은 빌려준 사람이 고마운 것이니 이자는 못 주더라도 원금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형편이 좋아졌는데도 안 갚는다면 사랑의 사람이 아니다.
45절: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님이 갈릴리에 도착을 하니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에서 예수님의 하신 일을 봤다고 한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영접을 한 거냐? 표적을 보고? 아니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무엇을 듣고 찾아온 거냐? 진리를 보고? 이적 기사를 보고? 보통은 무언가를 보고 영접한다.
‘능력’이란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인데, 차력사들은 이마로 돌을 깨는 능력, 손으로 철로 레일을 자르는 능력이 있는데, 사람이 만들어지게 하는 능력은 물질적인 그 어떤 능력보다 강한 건데 세상에는 사람이 만들어지게 하는 능력이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집에서만, 하나님 앞에서만 되는 거다.
46절-47절: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님께서 다시 가나동리도 들어가셨는데, 이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곳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두 세 통의 물을 채울 수 있는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니 물이 맛을 내는 포도주가 되었다. 이는 영원한 참 기쁨을 소유한 변화를 말한다. 항상 이 기쁨을 유지해야 하는데 왕의 신하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이 들었다.
‘가버나움’이란 ‘위로의 촌’이라는 뜻인데, 이 아이가 누구로부터 무슨 위로를 받으려고 하다가 열병이 난 건가? 그리고 아이의 아비가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을 알고 있는지? 즉 물을 변하여 포도주를 만드신 뜻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표적을 행했다는 것만 아는 건지? 왕의 신하가 때마침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라고 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아들이 열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아비의 마음이 오죽하겠느냐?
48절-4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이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저히 믿지 않는다’ 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믿음이 없다는 거다. 믿음이 있는 말을 할 것 같으면 아비가 예수님께 ‘내려오소서’ 라고 할 게 아니라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하옵소서’ 라고 해야 한다.
아버지의 말이 예수님께 ‘내려오소서’ 라고 한 것은 ‘아버지의 차원으로 내려오소서’ 이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차원이 아버지의 차원으로 내려가면, 육적인 차원으로 내려가면 그 아이가 고쳐지겠느냐? 안 고쳐진다. 혹 아이를 구원하려고 고쳐줄 마음으로 내려갈 수는 있지만 당신의 고상한 정신만은 내려가면 안 된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 아비는 ‘예수님이 가나동리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네’ 라는 것만 안 듯하다. 아무튼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면 세상의 염려 걱정을 하다가 병이 나기 마련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참 위로를 받지 못하면 병이 나기 마련이다.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나 죽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들어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이 있는 곳에 가던 안 가던 똑같이 능력이 들어가고, 어떤 장소나 시간에 상관이 없이 이뤄진다. 이게 믿어지느냐? 왕의 신하는 이것을 모르고 자기 눈으로 직접 아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들어 있는 거다. 말하자면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는 것을 봐야 되겠다는 마음이니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이 아비의 마음은 당신의 능력을 못 믿는다는 뜻이 되는 거다.
성경에 보면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에 걸리자 직접 예수님께 와서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라고 하시니 백부장이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라고 했다. 백부장의 신앙은 주님은 왕이던 신하던 지위고하에 관계가 없이 역사를 하신다고 믿는 거다.
학식이 많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잘 믿어지느냐? 그 학식이 자기를 더 교만하게 만들어서 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론에 합당해야만 믿는 이성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세상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믿음이 클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신앙 믿음은 영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세상 것을 기준으로 신앙 믿음을 따지는 것은 기준이 잘못 되었다. 성경구절을 많이 외우면 믿음이 좋으냐? 사람이 안 바뀐 상태에서 성경지식만 많이 알고 있으면 예수를 죽이고 자기를 죽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의 온전이요 하나님의 실상화로 만드는 건데 이걸 모르고 이성적인 신앙을 가지게 그 지식이 자기를 죽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읽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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