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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자들아!
마태복음 22:15~22
옛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합니다. 같은 말이지만 표현 방식과 진정성 여부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말은 바른 말이어도 거기에 진정성이 결여되면 신뢰하기가 어렵고 혼란스럽습니다. 본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 제자들과 헤롯당원을 예수에게 접근시켰습니다. 신념이 다르면서도 이권을 위해서는 서슴없이 연대하며 공동전선을 펼치는 교활한 자들입니다. 예수 타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섬뜩합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친일이든 반공이든 무슨 상관이냐는 식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22:16). 이 말은 번드레해 보이지만 거짓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실이 담기지 않는 말, 곧 속이 빈말입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궁극의 말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22:17)였습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수작입니다. 주님은 이미 저들의 불의한 속심을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세금을 내라’ 하면 ‘반민족주의자’요 ‘제국주의자’라고 비판할 것이고, ‘내지 말라’ 하면 현행질서를 부정하는 반정부주의자라고 비난할 것이 뻔합니다. 명색이 백성의 지도자요, 종교의 권위자인데 그 인품이 치졸하고 교활합니다.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는 이런 거짓된 말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재주꾼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대놓고 ‘위선자’(18)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의 화법은 거침이 없습니다.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자애롭지만 강고하고 사악한 자에게는 일고의 망설임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시고 거기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묻습니다.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과 그가 ‘신의 아들이며 국가의 아버지’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2:21). 이 한마디 말씀으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조직적인 연합전선을 물리치셨습니다. 황제에 대한 복종을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주적 통치자이심을 밝히므로 저들의 질문을 머쓱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동등한 가치가 아닙니다. 그들은 탄복하며 물러갔습니다.
바리새인은 ‘구별된 자들’이라는 의미로 유대 민족주의에 기반하여 율법 준수를 강조하며 경건한 삶을 실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출신 예수가 등장하여 백성의 인기를 끌자 주님을 적대시하였고, 주님도 그들의 이중성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로마를 거부하면서도 실제로는 로마가 만든 세계에 안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속을 경멸하면서도 그 세속 정신인 안일과 편리를 추구하는 현대 그리스도인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여기 그 너머 초월의 세계를 보는 안목이 부족하기는 교회와 바리새인이 일반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를 위선자라고 호통하십니다.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제게도 바리새인의 위선과 이중성이 있습니다. 제자의 길을 걷는다고 하면서도 머리에만 머뭅니다. 삶에 이르지 못하는 생각이 부끄럽습니다.
찬송 : 390 예수가 거느리시니 https://www.youtube.com/watch?v=ZBzeancYwbc
2023. 3. 19 주일
그림은 제임스 티소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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