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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제
마태복음 22:23~33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채근하였습니다. 사두개인이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에 기원하는 성전 중심의 세력입니다. 이들은 로마제국에 우호적이고 정치, 종교, 경제에 있어서 기득권층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바리새인과 대립하였고 세속에 대하여서는 개방적이었습니다. 친로마적이고 친헬라적인 이들은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때 성전이 무너지면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성전과 함께 생성하였고, 성전과 함께 소멸하였습니다. 부활과 천사와 내세를 부인하여 바리새파와 대조를 보입니다.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쳤던 바리새인에 비하여 예수님의 비판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이는 당시 백성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바리새인보다 못했다는 의미이지 본질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동일한 비판을 받았습니다(마 16:6,11).
이들 역시 예수님이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인기를 얻자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들고 온 문제는 ‘부활’이었습니다. 앞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이 연대하여 ‘세금 문제’로 예수님을 정치적 올무에 걸려던 것에 비하여 훨씬 종교적이고 신학적입니다. 그들은 ‘형사취수제’를 근거로 부활의 상황을 지적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부활을 전제한 질문이 난센스입니다. 예수님에게 흠집을 남기려는 악의가 분명합니다. 일곱 형제가 있는 집안에 시집온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자녀 없이 죽자 당시 제도에 의하여 그 동생이 형의 대를 이어 형수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죽었습니다. 그렇게 일곱 형제가 다 대를 잇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부활의 때에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인가가 사두개인들의 질문 요지였습니다. 부활 신앙이 가진 모순을 합리적으로 비판하여 ‘부활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무지했고, 성전에 기대 살았지만 믿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을 듣고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22:29)고 답하십니다. 사두개인들은 논리로 진리를 판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환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22:32a). 이는 출애굽기 3:6의 인용구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두려워하는 모세를 설득하여 출애굽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또렷한 자기 계시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품부된 삶에서 하나님을 현재의 하나님으로 인식한 신앙 위인들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역시 옛날 옛날 고릿적 하나님이 아니라 현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22:32b). ‘죽은 자의 하나님’이란 ‘죽음에 갇힌 하나님’을 의미하고, ‘산 자의 하나님’이란 ‘죽음도 가둘 수 없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음의 시제는 현재입니다. 육체는 쇠하여 소멸에 이르더라도 영혼은 죽음에 갇히지 않고 영원을 사는 믿음이 부활 신앙입니다.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은 영원에 잇댄 시간이며, 미래의 구원을 입증할 때입니다. 오늘이 없으면 영원도 없습니다. 산 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송 : 170 내 주님은 살아계셔 https://www.youtube.com/watch?v=eslHm998Qqw
그림 : #제임스티소
2023. 3. 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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