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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마태복음 22: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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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개인들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당하지 못했다는 소문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와 편을 들어 예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반은 호기심이고 반은 적대감이 분명합니다. 대제사장들과 헤롯당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등 당시 종교 권력을 틀어쥔 이들이 4각 동맹을 맺고 주님을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의 불의한 동맹에 비하여 선한 이들의 의로운 연대는 왜 까다롭고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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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22:36). 역시 바리새인들은 고칠 수 없는 중증의 종교 중독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주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묻습니다. 자랑하기 위하여 지식을 습득하면 지식 본래의 의도는 퇴색됩니다. 공부를 남보다 우월하기 위하여 한다면 공부는 경쟁 수단이지 진리의 도구가 아닙니다. 남을 대적하기 위한 지식 습득은 전쟁 때의 무기처럼 파괴적이고 악마적입니다.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서도 풍요로운 지성과 너그러운 인품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인류 역사는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고 지식 만능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가능해졌습니다. 특히 우주학과 생물학의 발전은 눈부십니다. 이제 인간의 지성은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수준에 도달하였습니다. 생물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한 인류는 이제 새로운 종의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 지경까지 이렀습니다. 그런데 과연 할 수 있다고 무엇이든 다 해도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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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보다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왜 지식을 습득하느냐에 대한 질문이 진지하게 선행되어야 합니다. 인류의 오랜 숙원인 질병도 고치고, 돈도 벌 수 있는 길이라고 유혹하지만, 과연 그런지 심사숙고하여야 합니다. 자연과학도가 자신의 학문보다 먼저 인문학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공부의 목적을 망각하면 소탐대실에 이릅니다. 바리새인처럼 남을 비난하되 진리의 주님을 대적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목적을 잊어버리면 누구라도 바리새인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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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22:42).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22:43~44). 이는 다윗의 시인 시편 110:1의 인용인데 바로 ‘메시아 예언시’입니다. 시편에 ‘메시야 예언시’ 모두 7번 나오는데 2, 16, 22, 24, 45, 72, 110편입니다. 구약에서 다윗은 드물게 삼위일체론적 신인식을 하였던 신앙인입니다. 그 깊은 신비를 바리새인들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 지식을 자랑하면서도 아는 것 없는 모습이 영락없는 한국교회 지도자와 닮았습니다. 책 한 권 읽은 이가 가장 무섭다고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책의 서문도 제대로 읽지 못한 이들이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어 슬프고 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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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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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넘치는 지식이 왜곡되는 것도 문제지만 턱없이 모자라도 것도 걱정입니다. 지성이 진리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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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314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jyzJ78zCNFg
그림 : 제임스 티소
2023. 3. 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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