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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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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행9:에 보면 도르가, 즉 다비다가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다가 피곤해서 몸살이 오고 병이 나더니 못 고칠 병으로 죽어버렸다. 이에 제자들이 가까이에 있던 베드로를 불러와서 베드로가 기도해서 다비다를 살렸다.
믿는 사람이 선행과 구제를 하면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특히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의례 주님을 믿는 성령님의 마음으로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선행과 구제를 할 수 없는 거냐? 불신세상도 돈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면 다비다가 이런 개념으로 선행과 구제를 한 거냐? 이건 아닌 것 같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 구제활동을 많이 했다. 이러다 보니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전하는 일이 등한시되어서 구제에 전념하는 집사를 세웠다. 교회가 위주와 방편에 집중하다 보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가 믿음으로 한 거냐, 안 한 거냐?’ 하는 차원으로 보지 말고 이런 관점으로 봐라.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 왼쪽에 있는 자들이 자신들은 성경구절대로 전도하고 가르치고 구제했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난 너희들을 모른다. 어두운 데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는데, 이것과, 다비다가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한 게 어떤 차이가 있느냐? 화살이 과녁의 한가운데 까만 점에 맞으면 적중이다. 그다음에 9점, 8점, 7점이 되는 선이 있다. 우리의 신앙은 화살이 과녁의 한가운데를 맞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본질적으로 적중성이 되어야 한다.
헬라어 성경에 어떤 공간이나 소속을 말할 때 ‘인(IN)’을 쓰는데, 동그라미의 중심을 놓고 이 동그라미 안을 지나가는 인도 있고, 동그라미 밑으로 가는 인도 있고, 동그라미 위로 가는 인도 있고, 동그라미 옆쪽으로 올라가는 인도 있고, 중심점에서 밖으로 나가는 인도 있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 신앙사상이 진리본질에 얼마나 적중성인지를 깨닫게 하는 거다. 아무리 믿음으로 한다고 해도 위주가 달라지면, 적중성이 아니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
사람이 옳은 것을 알면, 진리생명을 알면 성품이나 심성이 바르게 되어나간다. 그런데 흑과 백을, 천국과 땅의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천국의 것을 가지지 않고 땅의 것을 자꾸 주장한다면 이 사람은 진리본질에 적중성의 신앙이 아니라서 선택적인 면에서 하나님 앞에 악한 거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흑백을, 천국의 것과 땅의 것을 가르쳐 주지도 않으면서 ‘성경을 육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라고 하며 정죄하게 되면 정죄하는 사람이 악한 거다. 옳은 답을 가르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는데도 육적으로 나간다면 육적으로 나가는 사람이 악한 거다. 또한 옳은 것을 들었으면 자기의 마음과 정신과 소원과 목적이 어디에 거하고 있는지를 알고 고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옳은 것을 깨달은 것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면 공격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밉보이게 된다. 은혜를 못 받게 된다.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된다.
옳은 말씀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서 다른 사람이 잘못된 것을 보고 같은 아픔을 가지고 옳은 것을 가르쳐주는 게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심을 보신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지식의 버릇이랄까, 마음이랄까 정신이랄까, 성품이랄까? 예수 믿으면서도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자꾸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 이게 언제 고쳐질까? 우리는 남을 먼저 보는 눈으로 자기부터 먼저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설교는 일방적이다. 본질로 일방적이면 괜찮겠는데 육적인 개념으로 일방적이라면 문제다. 이걸 피하기 위해 예배 때 일방적인 설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해 묻기도 하고 답하기도 하면 좋다. 이렇게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살필 수 있는 여력도 생긴다. 성경문답 시간에 궁금한 게 있는데도 묻지 않으면 나중에는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우리의 육적인 면은 구원도리와 이치를 깨닫게 하는 비유와 비사로 준 것인데 자타의 질병이나 모양이나 장애를 보고 영적인 면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소경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게 많은데, 일반적으로 보고 느끼면서 원인으로 들어가라. 겉으로 나타나는 것에서 원인을 발견해서 ‘그래서 표면이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하고 오묘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면을 보고 함부로 단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고 듣고 손으로 만지고 피부로 감각되고 하는 것을 통해 자타의 이룰구원을 깨달아야 한다. 손은 주는 손이요 받는 손이다. 손으로 주고받으면서 의사소통이 되고 기쁘고 즐겁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물질에 대해 구두쇠 짓을 하면서 ‘영적 영적’ 한다면 뭔가 잘못 깨달은 거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기쁘다. 이 말의 뜻을 가만히 생각해 봐라.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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