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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숙고(深思熟考)
필자는 작금의 한국 교회가 루비콘강을 건넌 것으로 보고, 성경으로 돌아가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그 이유 네 가지를 피력한다.
첫째, 하나님의 정체성이 무너졌다.
하나님의 정체성 가운데 하나가 복의 근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을 주는 분이지 복을 빌어주는, 즉 축복해 주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목회자를 포함해 대다수 크리스천이 하나님에게 축복해달라고, 즉 복을 빌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성경에서 축복과 복이라는 말이 창 12:3에 처음 나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 내가 복을 주고..."라고 했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을 내가 축복해주고(복을 빌어주고)"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이렇게 쓴 성경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에 성경이 아니다.
한글 성경의 백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축복과 복이다. 즉 우리말 성경은 읽는 그대로 하나님이 복 주는 분임을 알 수 있으나, 영어 성경은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여서, 복을 주는 것과 복을 비는 것을 둘 다 bless로 썼다. 따라서 하나님이 복 주는 분인 것을 관념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히브리어 '바라크'도 마찬가지다.
작가 조지오웰은 말은 의식을 넘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다. 이 말을 "하나님 축복해주시옵소서"에 대입하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높은 신(돈,명예,권력의 신)이 있다는 말이 된다. 꽤 이름이 알려진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처럼 축복과 복을 같은 뜻으로 써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치다. 말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건 맞지만, 교회에서는 변하는 말을 수용해서 써야 할 말이 있고 일깨워 바로잡아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복과 복은 하나님의 정체성과 직접 연관되는 말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경대로 옳게 쓰도록 일깨워줘야 하는 말이다. 아직은 축복과 복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처럼 많지는 않지만, 안티 크리스천들은 목사를 먹사로, 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르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 말이 복과 축복처럼 널리 통용되면 시대에 따라 변한 말이니 수용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말실수가 없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라 했고(약 3:2), 심판 날에는 말실수(무익한 말, 터무니없는 말, 부주의한 말)에 대해 해명해야 하고, 하나님이 그에 따라 유죄와 무죄를 선언한다고 했다.(마 12:36,37) 무엇보다 성경이 모두 축복과 복을 구분해 썼고, 하나님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둘째, "목사"라는 호칭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헬라어 성경 사본에 "목사"라는 호칭은 없다.
필자가 소유한 12권 한글 버전 성경 가운데 8권이 엡 4:11에서 단 한 번 "목사"라는 단어를 썼다.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았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목사라는 말은, 지금과 같은 목사 직분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증거로 삼으려고 의도적으로 오역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제시한다.
1, 신약성경에서 목사나 목자로 번역한 헬라어가 "포이멘"이고 모두 20번 나오는데, 12권 버전 가운데 4권 성경(공동번역, 킹제임스, 회복역, 현대어)은 "목자"로 옳게 번역했다. 나머지 8권이 엡 4:11에서 단 한 번 "목자"로 번역해야 할 걸 "목사"로 번역했는데, 이들 성경도 다른 19절에는 다 "목자"로 바르게 번역했다. 문제가 되는 건 엡 4:11을 제외한 다른 절에 "포이멘"을 목사로 번역하면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 개 예를 든다.
* 마 26:31 내가 목사를 치면 양 떼가 다 흩어진다.
* 눅 2:8 ...밤을 새우며 양 떼를 지키던 목사들에게
* 요 10:2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양의 목사입니다.
* 히 13:20 양들의 큰 목사이신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이처럼 나머지 15절에도 "포이멘"을 "목사"로 번역하면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엡 4:11 한 곳에서만 말이 성립된다. 그래서 이걸 빌미로 성경에 "목사"라는 말이 있다는 근거로 제시하기 위해 "포이멘"을 "목자"가 아니라 "목사"로 오역한 것이다.
2, 예수님이 부활 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했다.(요 21:15,17) 즉 "목사"가 아니라 "목자"가 되라는 말이다.
3, 다윗이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했고(시 23:1), 예수님도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했다.
(요 10:11,14) 그런데 사람인 목회자가 스승 사(師) 자를 써서 "목사"로 호칭하는 건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은 랍비(선생)라 불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선생은 한 분이고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마 23:4) 헬라어 문법으로 볼 때 "목사와 교사"는 기능이 다른 두 가지 직분이 아니라 한 가지 직분이라는 것이다. 영어 성경 Easy to Read Version이 이 주장을 수용해 이렇게 번역했다. "Some people to have the work of caring for and teaching God's people.(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며 가르치는 사람들)" 우리말 성경은 유일하게 현대어 성경만이 이렇게 번역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후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약 600년 동안 조상들의 전통과 관습에 젖어 살아 예수님이 그걸 신랄하게 통박했다. 우리 경우는 1925년에 발행한 한자 성경이 엡 4:11에서 지금 "목사"로 번역한 "포이멘"을 "목회자"로 번역했고, 그로부터 12년 후인 1937년에 발행한 선한문 (鮮漢文) 성경이 이를 "목사"로 바꾼 것으로 미루어보아, 1930년대 중반부터 "목회자"라는 호칭이 "목사"로 바뀐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 그렇게 바뀌었을까? 합리적인 추론은 이렇다. 엄연히 양반과 상놈 계급이 있던 시대에 상놈 중에서 성경 말씀을 가르쳐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를 두고 고육지책 끝에 스승 "사(師)" 자를 붙여 "목사"로 부르지 않았을까? 당시의 시대 상황과 언어문화를 고려해, 보다 나은 포교 목적으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많다. 호칭은 중요하다. 호칭이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해주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호칭을 더 좋아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속마음도 읽을 수 있다. 어찌 되었든지 우리나라에서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한 건 넉넉잡아 한 세기에 불과하다. 이제 호칭 기득권을 내려놓고 성경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복과 축복을 세상 사람들처럼 같은 의미로 쓰고, "포이멘"을 "목자"가 아니라 "목사"로 쓸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있다. 성경을 이렇게 바꾸면 된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을 내가 축복해주고"로, 그리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포이멘" 스무 번 모두를 "목사"로 바꾸면 된다. 단 전제 조건이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지 않다면(시 119:120)
셋째, 기도의 종결어미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기도 종결어미는 "비나이다" 현재형 높임말 하나다. "빕니다" "빌었습니다" 또는 "비옵나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천지를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목회자를 포함해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다음과 같이 무려 열 가지로 기도를 마무리한다.
"기도합니다"
"기도하옵나이다"
"기도했습니다"
"기도했사옵나이다"
"기도하였사옵나이다"
"기도드립니다"
"기도드리옵나이다"
"기도드렸습니다"
"기도드렸사옵나이다"
"기도올리옵나이다"
필자는 이런 기도를 들을 때마다 사사기 21:25 말씀이 떠오른다. "그때 이스라엘에는 왕(하나님)이 없어서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했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명목상의 하나님만 있지 명실상부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없어서 빚어지는 현상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위 열 가지 표현 가운데 보고(報告) 형 기도인 "기도합니다"와 과거 시제 기도인 "기도했습니다"가 왜 틀린 표현인지 요점을 기술한다.
먼저 "기도합니다"는 "공부합니다, 세수합니다, 노래합니다"처럼, 말하는 주체가 무슨 동작을 하고 있는지를 알리는 표현이다. 그런데 주지하는 대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어서, 말하는 주체가 기도한다고 알리지 않아도 다 안다. 이 표현은 객관적인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릴 때에 국한해서 써야 한다. "오늘 예배에는 아무개가 기도합니다."처럼.
다음 과거시제 표현은 기도가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조금 전에 기도한 행위를 누군가에게 말할 때 "오늘 예배에는 제가 기도했습니다" 또는 "오늘 예배에는 아무개가 기도했습니다"처럼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가 끝날 때까지는 현재형으로 마무리해야 어법에 맞다.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이 고백이 끝난 후 "아무개씨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 상대가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기도도 마찬가지다. 지금 듣고 있는 하나님에게 이러저러한 걸 구했으면 종결어미는 마땅히 "기도드립니다"로 마무리해야 한다. 참고로 영어 기도는 모두 "Pray in Jesus name"처럼 현재형 시제 하나로 끝맺고,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도 역시 현재형 시제로 끝난다.
또 하나 간과해서 안 되는 게 말에는 뉘앙스가 있다는 거다. 누군가에게 이러저러한 걸 부탁하고 마지막에 "부탁했습니다"로 말을 맺으면, "내 부탁 들어주지 않으면 좋지 않아." 하고 협박하는 느낌이 든다. 용돈을 좀 올려달라고 부탁하는 아들이 "아버지 다음 달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용돈 좀 올려주세요.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과거시제로 말을 맺으면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얼마나 당혹스럽겠는가? 물론 하나님을 협박할 리야 없겠지만, 전술한 대로 하나님은 우리말의 뉘앙스까지 아는 분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말 관습은 제사 지낸다고 한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 제사를 받는 분이 지존하신 하나님이기에 성경은 다 "제사지낸다"라고 하지 않고 "제사드린다"로 썼다.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에 기도나 예배를 받는 분도 역시 지존하신 하나님이다. 따라서 기도도 예배도 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하는 게 바른 표현이다. "기도 드리옵나이다" "기도 올리옵나이다"도 문법적으로는 틀린 표현이 아니지만 "기도드립니다"가 보편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표현이다.
넷째, 기도와 기도문 낭독이 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변(辯)이 하나같이, 기도하는 사람이 구하는 것을 써서 읽는 거니까 기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혼자 기도하거나 소그룹 모임에서 기도할 때는 써서 읽지 않는다. 유독 주일 예배처럼 교인이 많이 참석하는 예배 때의 대표 기도는 기도문을 써서 읽으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성경에 "율법을 낭독한다"는 말은 있어도 "기도문을 낭독한다"는 말은 없다. 모두 "기도하라, 기도하니, 기도하고"로 썼다. 그리고 기도와 기도문 낭독이 어떻게 같은가? 분명하고 확실한 건 "기도문 낭독"에는 "기도"에 없는 "는 낭독"이라는 말이 덧붙지 않았는가? "그분 말씀에 덧붙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너를 꾸짖고, 너를 거짓말쟁이라고 할 것이다.(잠 30:6)"
거짓말쟁이들은 모두 유황이 타오르는 불 못에 던져진다.(계 21:8) 위 두 말씀이 기도와 기도문 낭독이 같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건 아닌지 숙고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기도에는 미사여구의 수식어가 많지 않아, 그 기도를 녹취해 글로 옮기면 말 그대로 구어체(입말) 문장이어서 이해하기가 쉽다. 그리고 기도한 사람이 자기가 기도한 내용을 복창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도문은 미사여구의 수식어로 장식된 만연체 문장이어서 기도문을 낭독한 사람이 자기가 낭독한 기도문을 복창하지 못한다. 언어학자들은 구어체 문장, 한 문장의 단어 수는 최대 스물두세 개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수를 넘기면 청자가 듣기를 포기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도문은 만연체 문장이어서 듣는 대로 바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더 문제가 되는 건 기도문을 써서 낭독하라고 가르치는 건, 그 사고 발상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본주의 사고 발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이 있는데, 기도문을 써서 낭독하면 목회자 편에서는 예배 순서의 차질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고, 낭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기도하다가 생각이 막혀 낭패당할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 그래서 인본주의 사고 발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교과서 낭독한 걸 강의했다고 하지 않고, 설교문 낭독한 걸 설교했다고 하지 않듯이, 기도문 낭독한 걸 기도라고 할 수 없다. 그래도 굳이 기도문을 낭독하게 하려면 주보에 사실 대로 기재하면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로, 기도문 낭독하는 사람은 "기도문 낭독"으로. 기도문 낭독하는 사람을 주보에 "기도"로 기재하는 건 분명히 거짓이다. 주보에 사실대로 기재하는 건 기도 훈련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기도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필자의 사례로 기도 훈련 방법을 소개한다.
* 기도문을 쓰되 되도록 수식어는 피하고 평소의 자기 말투로 쓴다. (문 장은 짧을수록 좋다.)
* 글자 크기를 14-15폰드 정도의 크기로 석 장을 인쇄해, 하나는 집에, 하나는 차나 주머니에, 하나는 일터에 놔둔다.
* 기도를 일주일 전에 통보받은 걸로치고, 하루에 최소한 12-15번 정도 반드시 소리 내서 평소 말하듯이 읽는다. 실제 기도하는 것처럼.
* 당일 단상에서 눈을 감고 하나님만 응시하고 연습처럼 기도한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준비하고 당일 단상에서 눈을 감았는데 하나님이 아니라 회중이 아른거리면, 그런 사람은 연습이 덜 되었다는 증거다.
따라서 하나님만 주목할 수 있을 때까지 대표기도를 미루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게 하나님에 대한 예의다. 구약 시대의 까다로운 제사 규정을 생각해보면, 이런 정도의 연습도 하지 않고 대표기도를 한다는 건 선한 양심이라고 할 수 없다.
다섯째, 교회에서 쓰는 용어를 선택할 때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중보기도"다. 요점만 기술한다. 성경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인데, 바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딤전 2:5)" 예수님의 고유 역할을 사람이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머리를 맞대면 얼마든지 좋은 용어를 발굴해 사용할 수 있다.
쇠귀에 경 읽기가 된 지 오래되었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1937년도에 발행된 선한문(鮮漢文) 성경에는 "헌금(獻金)"이라는 말이 없다. 16군데 모두 "연보(捐補)"다. 그러던 것이 개역개정판 성경이 제일 먼저 16군데 연보 가운데 8군데를 헌금으로 바꾸었고, 이 영향으로 그 이후에 발행하는 성경에는 연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연보는 줄 연(捐) 도울 보(補), 즉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내는 목적이 있는 돈이다. 그러나 헌금은 바칠 헌(獻) 돈 금(金), 즉 돈을 내는 행위가 헌금이다. 개역개정판 성경이 연보를 헌금으로 바꾼 후 오랫동안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돈의 의미로 사용해 사전에도 그렇게 설명을 달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써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은어(隱語)나 속어(俗語)가 사전에 등재되었다고 해서 그런 말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듯이.
이렇게 헌금이라는 말이 목적 없이 돈을 바치는 행위를 말하기 때문에, 헌금이라는 말은 반드시 돈을 바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단어와 합성어로 사용해야 한다.
* 건축을 위해서 내는 돈은 건축헌금.
* 구제를 위해서 내는 돈은 구제헌금.
* 장학을 위해서 내는 돈은 장학헌금
* 정치 발전을 위해 내는 돈은 정치헌금
* 선교를 위해 내는 돈은 선교헌금 등.
그런데 작금 한국교회의 헌금 종류가 85가지나 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는 말이 안 되는 헌금 이름이 꽤 있다. 몇 개 예를 든다.
"수요예배헌금, 심방헌금, 송구영신
헌금, 유산헌금, 주일헌금, 성령충만
헌금, 합격헌금, 작정헌금" 등.
유산하기 위해서 돈을 바치고,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 돈을 바치고, 합격하기 위해서 돈을 바친다? 한마디로 코미디가 아닐수 없다. 한국교회가 체면 안 가리고 배금주의 사상의 극치(極致)를 달리고 있다는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전술한 대로 말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는데, 작금의 한국 교회가 배금주의 사상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만약에 이런 게 말실수라고 하면 마지막 심판 날 하나님께 다 해명해야 하는데,(마 12:36,37) 해명을 들은 하나님이 어떤 선언을 하실까? 무죄일까? 유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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