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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지지 않는 원칙
마태복음 26:5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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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불의한 체포를 거부하거나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살이에서 그런 억울한 경우를 만나면 ‘주님처럼 참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은 이 사건을 힘과 힘의 대결이나 정의의 관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체포와 구금과 기소와 심문 등 일련의 재판 과정을 약속에 대한 성취로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맺은 언약, 즉 구약을 관통하는 구속의 약속과 선지자들의 예언이 오롯이 실현되고 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묵묵히 죽임의 길을 걸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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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주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주님에게서 죽일 죄를 찾던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요 2:19)신 말씀으로 올무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하신 말씀’(요 2:21)입니다만 이를 신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제사장과 종교권력자들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고 분노하며 주님을 책잡고 있습니다. 당시 종교 권력자들이 신학적 깊이가 얕고 문자주의의 맹목성에 함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일반입니다. 무지한 자가 권력을 쥐면 세상은 난장판이 됩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가 무지한데다가 믿음이 좋으면 본문의 대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맙니다. 대제사장은 주님께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26:62 새번역)라며 대답을 종용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무지하고 맹목적이고 권력화된 이들과는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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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26:63)고 채근합니다. 이런 질문은 전에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주님의 살 길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을 부인하면 주님은 죽지 않아도 됩니다. 재판은 의미가 없어지고 예수님은 풀려날 것입니다. 다만 구약의 모든 약속과 예언은 허구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26:64). 아, 주님은 살길을 포기하십니다. 대제사장은 격분하여 신성모독(래 24:16)을 근거로 사형을 선고합니다. 하지만 이 판결은 원리적인 면에서 무효입니다. 유대의 최고 재판소인 산헤드린은 7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낮에만 열리도록되었고 안식일과 유월절에는 열리지 않았으며 재판은 반드시 성전의 회당에서 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원칙들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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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원칙이 지켜지는 삶이 있고,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삶이 있습니다. 삶에서 원칙이 지켜지면 정의롭고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아니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지켜지는 경우보다 훨씬 많습니다.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질서에서 주님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억울한 일입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죄인의 구속자가 되셨고, 억울한 자의 대변인이 되셨습니다. 욥기가 십자가 논리를 제공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세 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이 장면은 덴마크 화가 칼 블로흐1834~1890가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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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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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그때 그 안나스는 지금도 교회 안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반역하는 죄에 이르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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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295 큰 죄에 빠진 나를
https://www.youtube.com/watch?v=s78Vc7e-x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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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칼 블로흐의 <베드로의 부인> 캔버스에 유채, 19세기
2023. 4. 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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