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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죽음에 이르는 병
마태복음 2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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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 프랑스1844~1924의 소설 『타이스』1890는 세속의 욕망을 다 버리고 평생 깊은 영성과 금욕을 실천하는 수도사 파프뉘스와 당시 최고의 화류계 여성 타이스의 구원을 다루며 인간이 유혹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보여줍니다. 파프뉘스는 4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귀족 출신으로 한때 향락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다가 제자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고 모든 재산을 버린 채 사막 수도원에 귀의합니다. 그리고 철저한 경건과 금욕을 실천하므로 시대의 존경받는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파푸뉘스는 어느 날 사막에서 기도하다가 환상 가운데 한 무희를 보게 되었고 그녀를 구원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타이스라는 여성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화류계 여왕이었습니다. 파프뉘스는 그녀의 집을 찾아가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고는 있지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삶에 대한 회의로 괴로워하고 있던 타이스는 사막수도사가 전하는 구원으로의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타이스는 사막수녀원에 들어가 지난날 취했던 향락의 삶을 참회하며 구원의 은총 앞에 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타이스가 거룩을 향해 정진할수록 파프뉘스는 그녀에 대한 육욕으로 온 몸이 뜨겁게 불타기 시작하였습니다. 타이스가 죽음 앞에 이르자 파프뉘스는 설령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타이스의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에 휩싸입니다. 그는 자신이 설교하였던 영원과 경건을 포기하고 타이스에게 다시 세속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타이스는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고 파프뉘스는 흉측한 흡혈귀 모습을 합니다. 『타이스』는 거룩과 세속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경건과 금욕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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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유혹에 약하고 죄에 쉽게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범죄 자체보다 범죄 후가 중요합니다. 유다는 주님을 배신하여 은 삼십에 스승을 팔았습니다. 제자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유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은 제 살길을 찾느라 주님을 버려두고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유다와 제자들과 베드로의 잘못에 경중을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유다와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 중에 무엇이 더 무거운 죄일까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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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주님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잡혀 사형선고 받는 모습을 보고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습니다. 사태를 돌이킬 수는 없더라도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는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절망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에 들어섭니다. 반면 베드로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배신의 사람 유다도, 부인의 사람 베드로도 자기 잘못을 후회하였지만 한 사람은 역사의 죄인이라는 오명을 썼고, 한 사람은 교회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멸망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회개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멸망하며, 은총을 거부하기 때문에 죽습니다. 죄책을 감당하지 못하여 스스로 절망하는 유다야말로 은총을 거부한 자입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절망하는 유다를 네덜란드 화가 칼 앨버트 슈미트(1880~1920)가 잘 표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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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사탄은 매일 저를 정죄합니다. 절망을 이길 믿음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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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290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https://www.youtube.com/watch?v=CN0fvLFiE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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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4 화
댓글 '1'
김봉진 목사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1절)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2절)
'결박'은 두 손을 뒤로 모으고 포승으로 묶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사형과 같은 극형을 인도받은 자들을 언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밤새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의한 후 미리 짠 각본대로 신속하게 사형을 판결하고, 예수님을 유대의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재판받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지 않으셨다면, 아무리 증인을 세우고 계략을 짜낸들 그들은 예수님께 손 하나 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승리라고 환호하는 일에 부러워하지 말고, 세상이 실패라고 조롱하는 일에 절망하지도 맙시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3절)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4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5절)
종교지도자들은 자기 과오에 괴로워하는 유다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고 외면합니다. 예수의 무죄함을 알고 자신들도 공범이면서도 유다에게만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떠넘깁니다. 복음은 모르고 종교적 신념만 있는 지도자의 교만과 탐욕이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둘 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배신하거나 부인했고 둘 다 후회했지만,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며’ 회개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회복되었고, 유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써 영원한 저주의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된 회개는 후회를 넘어서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허물을 인정하고 주께 고하여 주의 은혜로 다시 일어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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