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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바냐? 그리스도냐?
마태복음 2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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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빌라도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가 로마의 속국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약소국의 설움은 당시 유대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역시 뼈저리게 느끼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세계 6위의 국방력을 소유한 국방대국이지만 전작권은 우리가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 치욕의 상황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이들도 많으니 참 딱합니다. 전쟁을 아이들 불장난처럼 생각하는 철부지 지도자 시대에는 차라리 잘된 것이라는 역설이 도리어 슬픕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는 있으나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현대인의 삶은 식민시대보다 더 간고합니다. 맘몬주의가 만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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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빌라도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유대 사회의 입법과 사법을 총괄하는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공의회의 한계입니다. 의장을 포함하여 모두 71명의 공의회원으로 구성되어 유대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에 따른 재판을 주관하며, 성전의 치안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반드시 낮에만 개정하고, 안건은 만장일치로 의결하였으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다음날 다시 심의를 거쳐 판결하므로 억울한 사형수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산헤드린의 재판은 원칙적으로 무효한 불법 재판인 셈입니다.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법살인이 자행되었는가를 생각하며 주님의 재판에 위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지금도 법 정신은 훼손되고 사법 정의는 왜곡되고 있으니 딱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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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시대에 사형은 로마의 권한이었으므로 산헤드린은 총독 빌라도에게 주님을 보냈습니다. 산헤드린이 주님에게 내린 판결의 죄는 신성모독입니다. 하지만 총독으로서는 식민지의 종교 문제로 사형에 이르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알고 있는 산헤드린은 주님에게 사형이 집행되도록 종교적 죄를 정치적 죄로 치환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검찰이 자행하는 별건수사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정작 자신들은 신성모독이라는 종교 문제로 사형을 결정하고서 실제 사형이 집행되도록 위하여 정치화한 셈입니다. 교묘하고 사악합니다. 산헤드린의 고소장을 누가가 요약하여 증언합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 23:2). 첫째는 반란자이며, 세금을 거부하는 선동자이며, 로마 황제에게 역모를 꾸민 중죄인이라고 포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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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는 잔인하고 무자비하여 유대 사회와 반목이 깊은 지도자입니다. 그런 빌라도조차 주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책임에서 회피할 방법을 강구하던 중 명절에 죄수를 사면하는 예를 들어 예수와 바라바 가운데에서 선택하라며 그 책임을 백성에게 미루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백성은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칩니다. 의외의 결과에 빌라도도 놀랐습니다. 백성에게 진리와 정의를 기대하기란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와 바라바를 구별하지 못하는 우매한 이들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시민의 의지는 역사 발전의 동력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장면 <에케 호모>를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1808~1879)와 스위스 출신 신고전주의 화가 안토니오 치세리(1821~1891) 등이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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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 시대 역시 우매한 이들에 의하여 몰상식이 자행되고 진리가 왜곡되고 있습니다. 정신 차려 깨어있는 삶을 실현할 믿음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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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147 거기 너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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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오노레 도미에와 안토니오 치세리의 <에케 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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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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