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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고다의 예수
마태복음 27: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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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그것도 성경을 그리는 화가는 단순히 재능을 뽐내는 환쟁이가 아닙니다. 역사와 철학과 신학에 대한 안목이 얕으면 성경을 그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깊은 자기 성찰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같은 장면을 그려도 십 년 전 작품과 십 년 후 작품이 다릅니다. 성경이 문자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점의 그림은 화가의 성경 해석이자 묵상이며 고백이자 기도이며 한편의 신학 에세이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에게 행하는 설교입니다. 어느 목사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나 <다윗의 소환장을 든 밧세바>보다 설교를 더 잘할 수 있겠으며, 어느 설교가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보다 현실감 있게 설교할 수 있겠으며, 어느 선교사가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보다 멋진 선교 메시지를 전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술과 문학과 역사 등 인문학을 백안시하며 딱딱한 교리 설교로 기독교를 경직화하는 철없는 목사들의 무지한 알껍데기는 도대체 언제나 깨어질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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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파 화가 니콜라이 게의 <골고다>(1893)를 보고 있자면 주님의 절망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아, 주님도 연약한 인간이셨습니다. 주님도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끼는 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십니다. 내가 조롱과 멸시를 견디지 못하듯 주님도 그러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할 때 말씀으로 함께하신 주님이지만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구속사의 완성을 위한 시점에 주님은 홀로 버려져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겁에 질리고 무서우셨습니다. 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이렇게까지 낮아지셨습니다. 화가는 공포와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주님의 모습을 처연하게 그렸습니다. 이는 십자가에 내리면서까지 근육질의 몸매를 강조한 루벤스의 그리스도(1612~1614)가 아니라 한없이 연약하여 부서질 듯한 렘브란트의 그리스도(1634)에 가깝고, 이미 700여 년 전에 이를 예언한 이사야의 글과 일치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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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정작 이 작품에서 주님의 처연한 모습 못지않게 뒤에 서 있는 두 강도에게 눈길이 갑니다. 한 강도는 판결에 불만을 나타내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드러내며 결기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편 강도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며 사형판결을 수용하는 모습입니다. 사형판결을 받을 정도로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같지 않습니다. 신체는 생략된 채 화폭을 가로지르는 빌라도의 팔은 거부할 수 없는 권력으로 군림합니다. 지금도 권력을 틀어쥔 자들의 무모한 욕망은 시민을 절망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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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와 장로들이 주님을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27:42). 주님의 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마저 주님을 욕했습니다. 다만 십자가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두 강도 가운데 한 강도가 제 동료를 나무랐다고 언급합니다(눅 23:40 새번역).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사 53:12 새번역). 주님을 바로 아는 사람이 지금도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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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교회는 많지만 하나님 나라를 닮은 교회는 드물고, 교인은 많지만 주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어둔 밤에 빛이 되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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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145 오 거룩하신 주님
2023. 4. 6 목
그림 :
니콜라이 게 <골고다> 부분, 1893, 캔버스에 유채, 트레차코프미술관, 모스크바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리는 그리스도> 1612~1614
렘브란트 <십자에서 내리는 그리스도>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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