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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주님이 십자가에서 본 것
마태복음 27: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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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관점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원뿔을 위에서 보면 원이지만 옆에서 보면 삼각형입니다. 원기둥은 정면에서 보면 사각형입니다. 지구에서 지구를 보면 끝없는 수평선(또는 지평선)으로 이루어진 평면이지만 지구 밖에서 보면 원형입니다. 자신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 보일 수 있으므로 굳이 자기만 옳다고 고집부리는 일은 유치한 일입니다. 사상과 역사와 문화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는 시선, 즉 역사관이 중요합니다. 식민사관을 가진 자들은 과거를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 대하여 불쾌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도리어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민족사관을 가진 이들은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역사뿐만 아니라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적반하장 하는 오늘의 일본에 대하여 몹시 불콰합니다. 독일과 비교하여 보편적 인류애는커녕 여전히 구시대 약육강식의 식민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웃을 둔 나라로서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문화를 대하는 시선도 그렇습니다. 오늘의 세계는 서양 중심의 문화가 일반화되었지만 그렇다고 동양 문명이 미개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세계 4대 문명이니 하면서 그 외의 문명을 평가절하하는 태도는 지식 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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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죄와 무관하신 분이 흉악자의 형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셨습니다. 죽음은 죄인된 인간이 겪는 최고의 고통입니다. 주님이 그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사야는 그 십자가 덕분에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의 질병이 치료받았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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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본 것>을 그렸습니다. 작품에서 주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십자가 바로 아래는 어머니 마리아가 두 손을 모으고 안타까와합니다. 그리고 이모와 두 마리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곁에 주님으로부터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받은 요한(요 19:26)의 안타까운 시선이 주님을 마주합니다. 말을 탄 종교권력자들의 교만한 모습, 창을 든 로마 군병들과 유대 병정, 여전히 주님에게 멸시의 눈을 보내는 군중, 예수를 욕하는 사람들, 성전을 사흘 만에 지어보라며 조롱하는 종교 기득권자들, 그런 중에도 손을 가지런히 모은 백부장이 보입니다. 멀리서 주님의 죽음을 안타깝게 쳐다보는 이들과 차마 주님의 죽음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이들도 보입니다. 그리고 아, 나도 저기 어딘가에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용감하지 못한 나도 저기 멀찍이 어딘가에 숨죽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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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땅에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바라보는 것에 익숙합니다. 미술 작품들도 대개가 그렇습니다. 루벤스나 렘브란트는 물론하고 엘 그레코(1580), 벨라스케스(1632), 고야(1780) 등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티소의 작품이 유별나면서도 신선하고 옷깃을 저미게 합니다. 지금은 주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볼 때입니다. 내 눈길보다 주님의 시선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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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내려 보시는 주님의 눈길에 마주할 자신이 없는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자기 객관화를 통해 주님을 온전히 따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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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150 갈보리산 위에 https://www.youtube.com/watch?v=MADkFxJuc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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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제임스 티소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신 것> 부분, 1886~1894, 캔버스에 유채, 24.8×23cm, 브루클린박물관,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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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7 금
댓글 '2'
김봉진 목사
예수님은 인류의 저주를 대신 안고 돌아가십니다. 바로 그때 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자던 성도들이 일어납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46절)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호소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 대신 '대속물'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당하는 처절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 죽음과 함께 생긴 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50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51절)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52절)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53절)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성소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고, 죽은 자들이 묻혀 있던 무덤이 터져 열립니다. 성소 휘장이 찢어짐은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살길이 열린 것이고, 하늘에 속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따라 죽지 아니함을 입을 삶의 길이 열렸음을 상징합니다(고전 15:45~53절).
- 백부장과 병사들의 고백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54절)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55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첫 사람은 놀랍게도 제자들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이방인' 백부장과 병사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들 역시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제자들이 아니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복음의 본질과 별개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 그 곁에 함께 있는 제자가 되고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갑시다.
김봉진 목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어둠에 싸여 숨을 거두십니다. 십자가 아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허무하게 죽어가는 실패한 혁명가의 모습만 볼 뿐입니다. 하지만 참 빛이며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빛과 생명을 세상에 나눠주며 어둠과 사망을 물리치는 위대한 승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남들이 못 보는 빛과 생명을 보는 사람입니다.
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45절)?
2)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사람들은 어떻게 오해했습니까(46-49절)?
3) 예수님은 영혼이 떠나기 전에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50절)?
나눔 1 죄 때문에 사망과 흑암에 갇힌 세상을 구하기 위해 죄 없으신 예수님이 대신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한 이유, 즉 하나님을 떠나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세상의 어둠과 참혹함은 무엇인지 이야기해봅시다.
나눔 2 예수님을 그저 로마에 저항하다 고통 속에 죽어간 정치범으로 여긴 사람들처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오해하고 있습니까? 그런 오해가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지 서로 생각을 나눠봅시다.
-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자신이 ‘생명의 주’임을 입증하십니다(51-56절).
1)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51-53절)?
2) 백부장을 비롯해 십자가 아래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무엇이라 고백합니까(54절)?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나눔 3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몸을 찢으신 십자가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었고(참조. 히 10:19,20), 그분의 ‘죽음’은 ‘생명’이 되어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참 의미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삶은 어떻게 다른지,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나서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이야기해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출처: 매일성경)
삶 _ 비록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이더라도 생명의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공동체 _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공동체, 부활의 생명을 발산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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