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17:6-19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7장 6절-19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 속에는 명령도 권고도 권면도 있는데 모두 ‘아멘’이고 ‘예’이지 ‘아니오’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모든 천군천사와 영들을 부리는 분이다. 그런 분이 일손이 모자라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심이 아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일을 하게 하심도 우리 마음이 섭섭할까봐 우리 마음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이 허락하시는 거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수종든다고 하면서 가만히 보면 주님의 일을 더 망가뜨려 놓는다. 자타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수종든다고 하면서 하나님 당신이 하실 일을 우리가 들어서 더 어렵게 만들어 놓는다. 그래놓고 또 큰소리를 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일을 내가 도와준다고 하다가 그 일을 망가뜨려 놓고서 큰소리는 내가 치고 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일을 옆에서 돋는다면 도와지는 게 아니라 망가뜨려진다. 하지 말라고 해도 얻어맞으면서도 울면서도 한다. 그런데 조금 더 크면 ‘아버지, 내가 해 보겠습니다.’ ‘그래, 해 봐야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으니 네가 해 봐라’ 하고 허락이 되는 것은 일은 잘 못 하지만 잘 못 하는 그 과정을 겪으면서 앞으로 더 진보 발전하여 완벽하게 되는 그 때를 기다리면서 허락을 하는 거다.
교회의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지 못한다. 하나님이 데려가신다. 우리가 이룰구원에서 완벽하게 돼 있다면 이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는 거다. 그래서 이 세상에 우리가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완벽하게 안 만들어졌기 때문에 안 데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빨리 데려가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빨리 만들어지면 된다.
이룰구원은 다 자기 할 탓이지만, 교회라 할 때는 교회를 인도하는 인도자가 있기 때문에 제일 큰 책임이 인도자에게 들어간다. 계:에도 ‘교회의 사자들에게’ 했지 ‘어느 교인들에게’ 그렇게 안 돼 있다.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이라고 볼 때 교회에서 사자노릇이 바로 돼야 하겠는데 이게 안 되니 짐승 짓을 한다. 그러니 교인들의 신앙이 어떻게 되겠느냐?
그래서 우리가 인류의 대표인 아담과 하와를 볼 수 있고, 또 구원의 대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고, 그리고 각 교회마다 그 교회의 대표는 그 교회 인도자이다. 인간의 세계는 그런 대표적인 의미로 들어가 있다. 대통령이 잘못하면 국민이 어떻게 되느냐? 가정에서 아버지가 잘못하면 어떻게 되느냐? 교훈도 그렇게 들어가 있다. 내리 내리.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영적 원리를 잘 찾아야 한다.
세상에서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감격 감사가 되는 것을 받았다. 일반은총도 받고 특수은혜도 받고. 특수은혜는 진리에 속한 것, 일반은혜는 일반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모든 여건. 그런데 교회가 특수은혜를 받았으니 특수인으로 자라야 할 텐데 그 특수성이 없다. 그러니 일반화이다. 이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전부는 받는 은혜다. 그래서 인간들이 자기를 대우를 안 해 준다고 해도 따지지 말라. 자타의 구원에 덕이 안 되는 일을 하면 주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다. 그래서 교회는 모두 하나님 앞에 수은자이지 시은자는 아니다. 목사님도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일에 수은자이지 가르친다고 해서 시은자는 아니다. 또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 입장에서 수은자로서 ‘받았으니 감사합니다’ 하고 물질적 시간적 노력적 충성봉사가 나오는 것이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이 있다면 부모님에게 용돈도 드리고, ‘내가 할 일이 없습니까’ 하고 나오는 건 자동적이다. 자동적인 것을 잘난 것처럼 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우리가 이방세상의 일을 보면 국가적인 일을 아무나 시키지 않는다. 똑똑한 사람을 시킨다. 하물며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이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하나님이 아니면 못한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실상화 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는 구원의 이 일은 신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를 기뻐하고 사랑하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혀 성령으로 우리로 인간구원의 하나님의 일에 수종들게 하셨다.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수종들게 하셨는데 우리가 어찌 인간의 수단 방법으로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이유를 걸고 원망불평적으로 할 수 있겠느냐? 그건 용납이 안 된다. 진리이치의 말은 땅의 것으로 섞으면 안 된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들어간다.
11절-19절: 갈릴리 지방은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많이 하신 곳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신앙정조를 못 지키는 개 같은 자들’이라고 멸시를 한다. 북조에 사마리아가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니 하나님의 허락 하에 앗수르가 쳐들어 와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다 잡아가고 외국의 남자들을 사마리아에 풀어놓았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나오는 아이들이 혼혈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지방 사이로 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개 같은 자들이라고 멸시받는 그 지방 사이로 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그 길로 가는 것이 욕을 얻어먹으려고 그 길로 가는 거냐, 구원이라고 하는 당신의 목적적 일이 있어서 그 길로 가는 것이냐?
예수님은 헛걸음을 하는 분이 아니다. 헛말을 하는 분이 아니다. 당신의 말씀이 나오면 상대가 순종이 되던 안 되던 그 말씀이 역사화 돼서 나온다. 본인에게 부딪힌다. 가령 오늘 말씀 깨달음에서 깨닫는 대로 순종이 안 되면 순종이 안 된 그 자에게는 그것이 사건화로 다가온다. 사건을 만나기 전에 말씀에서 깨달으면 되겠는데 못 깨달으면 얼마 안 가서 그 말씀이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럴 때는 피할 길이 없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그 예수님의 정신은 사마리아나 갈릴리나 그런 양쪽의 정신을 인정하지를 않고 거룩한 곳으로, 예루살렘 도시로 곧장 올라가는 그 발걸음이요 그 사상이다. 직장이던 뭐던 자기 삶의 발걸음에서 이걸 분별하느냐? 잘 안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양 사이로 올라가시는 것은 이 고을 사람이던 저 고을 사람이던 예수님의 거룩한 그 구원의 일에 같이 가자는 의도성이 거기에 들어있다. 국가적인 선거를 할 때 자기광고를 하고 표를 나눠주고 하는 건 ‘나와 같이 그 정치정신으로 올라가자’는 말이다. 그런 것처럼.
일반사람들은 국가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다 국민의 세금이고 그런 건데 ‘공짜다’ 하면 좋아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공짜를 좋아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비신앙이다. 더더군다나 정치인들이 막 일어나서 국민을 부자 되게 잘 살게 만들어 준다? 아니, 누가 잘 살게 만드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네가 부르짖고 있구나. 이건 성경의 눈으로 보면 교만한 사람이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와, 우리 지도자다’ 하며 뽑는다. 예수 믿는 자기를 누가 잘 살게 하고 못 살게 하고, 누가 사건을 주고 안 주고 하는 거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나 갈릴리나 그런 고을의 정신을 인정치 않고 그 사이로 갈 때에 ‘나의 이 뜻을 알아차리고 올라갈 자는 같이 올라가자’ 하는 그 의도성이 깔려있다.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한 고을에서 어떤 사람들이 나타났느냐? 문둥병자 열 명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에 왜 그렇게 문둥병자가 많으냐? 이 문둥병자 열 명이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긍휼히 여겨달라는 그 말속에는 ‘당신이 보시고 당신이 보기에 좋으신 대로 낫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의미가 들어있다. ‘내 좋은 의미대로’가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 좋은 대로’ 그 말이다.
문둥병자를 보면 참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문둥병이 심하면 정상적인 사람의 형태가 아니다. 그 정도란다면 그 사람의 살점이 떨어진들 아프겠느냐? 감각성 마비다. 아무리 음식을 먹어도 새로운 세포조직이 안 생기고 자꾸 녹아 들어간다. 죽어 들어간다. 뼈도 녹고 살도 녹아진다. 그러니 인간 존재로서 삶의 모습을 어떻게 나타내겠느냐? 멀리서 보면 흉측해서 도망을 간다. 참 사람의 모습은 아니더라. 보면 볼수록 멀어져야 할 사람이라.
자기 아내 자식도, 예수 믿는 사람도 ‘사대육신이 멀쩡한데 못 사귈 사람이구나’ 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건 문둥병자다. 성질 한 번 부리면 도무지 펴지 못하는 것은 곱사다. 그래서 우리에게 곱사도 보여주는 거고, 문둥병자도 보여주는 거다.
문둥병에 결려놓으니 자기 몸이 상하고, 자기 생명이 죽어 들어가고, 자기가 사람 가운데 못 사는 거지 남이 아니다. 그러니 그와 같은 정신과 마음의 병을 품지 말아라. 그게 본인의 병이다. 남의 병이 아니다. 성경은 성격이나 성질이나 자기의 도덕성을 미리 가르쳐 줘서 미연에 방지될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그래서 권고 권면하는 것이다.
문둥병자가 본인 스스로가 거울을 쳐다보면 자꾸 보고 싶을까? 살이 녹아들어간 것을 자꾸 보고 싶을까? 그들 역시 자기 얼굴을 쳐다보면서 자신들의 얼굴을 아는지라 그래서 사람 앞에 나서지를 못한다.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피해 다닌다. 부모형제, 처와 자식, 이웃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못 살고 떨어져 살게 된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자기가 병이 들면 격리가 된다. 마음이 고약하거나 정신이 고약하거나 신앙사상이 귀신들린 것처럼 되면 격리가 된다. 이건 사람으로서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다. 인간이면서 인간 속에 살지를 못하니 고통이다.
‘예수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기다렸을까? 문둥이 쪽에서는 예수님을 기다렸고, 예수님의 발걸음은 그들을 향해 올라온다. ‘기회는 이 때다’ 하고 그 기회를 잘 포착하는 이게 그 사람에게 있어서 문이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게 아니다. 건강의 기회, 젊음의 기회, 눈 밝은 기회. 기회는 항상 있는 게 아니다. 그 옳은 기회가 몇 시간이나 갈는지? 기회가 왔을 때, 문이 열렸을 때 빨리 빨리 하나님 앞에 할 일을 다 해야 한다.
‘예수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천만다행이다. 왜? 예수를 못 만났다면 평생, 아니, 영원히 어떻게 될까? 문둥병자가 예수를 못 만나고,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인간 가운데 살지를 못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고 하는 이걸 우리가 이룰구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들이 문둥병이 들기 전에 왜 예수님을 못 만났을까? 갈릴리 지방에서 예수님이 일을 많이 했다. 벳새다와 가버나움 고을로 다니면서도 일을 많이 했다. 그러니까 그 때 안 만나보고 마지막 장면에서 문둥병이 걸려서 왜 이 때 만나보느냐? 평소에는 무엇을 하다가 열 문둥병자가 이제 왔을까?
‘예수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이 선생으로서 그들에게 바로 가르쳐 줬다. 뭐라고? 어떻게 가르쳐 줬느냐?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
구약성경 레위기13:43-36에 보면 ‘문둥병자인지, 아닌지’ 하는 진단을 내리는 것은 제사장이 내린다. 이 안에는 계시가 들어있다. 문둥병이 나은 것은 제사장의 판단에 들어간다. 그러면 왜 꼭 제사장이 해야 하느냐? 이건 계시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인데, 모든 병을 진단하시는 분은 절대적으로 온전하고 완전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판단에 의해서 된다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이 보고 ‘이건 문둥병자다. 이건 아니다. 다 나았구나’ 하는 그 선언을 하는 거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여자여, 네 믿음이 네 병을 낫게 했다’ 고 했는데, 이게 주님의 선언이다. 나았기 때문에 나았다가 아니라 주님의 선언이라야 된다는 것이다.
영의 눈으로 보면 주님이 우리 모두 자기의 마음을 보고 ‘이거는 무엇이 결여돼 있고, 이거는 지혜지식성 면에 결여돼 있고, 이거는 도덕성 면에 부족하고, 너는 소경이고’ 하는 게 주님의 진단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절대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에, 참 인간이기 때문에 그 분 당신의 마음과 같지 않으면 그건 병들고 꼬부라지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걸 깨닫게 하려고 대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것이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할 일을 다 보여주는 거다. 그러니까 주님이 도성인신으로 와서 성전 안에서 가르치고, 밖에서도 가르치고, 도처에서 가르치셨는데, 예수님의 전체적인 33년의 그 일을 영의 눈으로 보면 모세의 장막성전이나 또 솔로몬의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제사를 드린 그 제사행위가 그 안에 계시적으로 다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전 일생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의식대로의 법대로의 행위 안에 계시적으로 들어있는 무형적인 참 성전을 벗어난 일이 없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 전 안에서 말씀의 번제단에서 잡히고 즉, 더러운 생각, 세속적인 거, 이방우상 사상적인 거, 미신적인 게 다 잡히고, 구석구석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쁜 것을 다 걸러내고 즉, 똥집 쓸개 다 걷어내고, 그 다음에 물두멍에서 깨끗이 씻고 해야 한다.
‘대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 구약시대의 의식대로 하라는 것이지만 이걸 계시의 눈으로 보면 대제사장이 문둥병자들을 보고 ‘이제 문둥병이 다 나았다’ 하는 선언을 하게 되겠는데, 대제사장의 이 선언은 예수님의 선언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참 대제사장이시요,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이 하는 일은 부분적인 면에서 예수님이 하실 일을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이 하는 일을 영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들을 고치시고서 이 문둥병자 열 명에게 대제사장 앞에 가서 보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당시의 제사장들에게 알게 하심이 들어있는 말이다.
누가 문둥병을 깨끗케 하느냐? 주님이시다. 하나님이 아니면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고 나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것은 당신이 메시아이시요 하나님이심을 제사장들로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성전에서 온 이 문둥병자 열 명은 이미 대제사장이 문둥병자라고 선언을 해서 나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제 다시 대제사장 앞에 와서 ‘내 문둥병이 다 나았나 봐 주십시오’ 하니 ‘다 나았다’ 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사람 가운데 살 수가 있는 거다.
문둥이 열 명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선언 받고 제사장에게 가다가 자기 몸을 살펴보니 다 나은 것이다. 도착이 돼서 나은 게 아니고 가다가 나았다. 이걸 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대로 살다가 보니 자기가 어느 사이에 완전자 온전자 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속에는 이게 들어있다.
이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제사장을 향해 간다. 말씀해 의해서 간다. 목적하여 가다보니 나았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대로 주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 가다보니 자기의 더러운 성격과 성질들이, 사람 상종 못할 그런 것들이 고쳐졌다 그 말이다. 그래서 예수 믿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안 그러면 격리가 된다. 성격 성질이 나쁜 사람을 어디에 가두지 않아도 그런 사람이 오면 피한다. 그게 격리다.
그러니까 새살이 돋고, 기능 지능이 되살아나고, 피부와 골각이 정상으로 바로 돌아오고, 오각과 오감성이 살아나고, 모든 것이 완전해 보일 정도로 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을 하니 참 새 사람으로 나오는구나. 세상에 이런 일이 있느냐? 이게 예수님 앞에서 말씀순종에서 되어지는 일들이다. 그래서 우리 속에도 문둥이가 되어가는 게 있고, 문둥이였는데 나아지는 게 있는 거다. 정신면에서 그런 게 있는 거다. 예수 믿는 걸 우습게 생각지 말아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맨날 율법만 외우라고 하고, 율법을 잘 준수하라고 하고, 그 말을 따라 충성봉사를 잘 했어도 영적인 면에서, 기능 지능 면에서 쪼그랑이 됐는데 이들은 그걸 모른다. 오늘날 육적으로 나가는 교회가 교인들이 영적으로 쪼그랑이 됐는지 아느냐? 모른다. 이걸 보는 눈도 없고, 감각하는 눈도 없고, 그걸 아는 지식이 없다. 세상 넓은 길의 정신 상태로 가게 하면서 그걸 자꾸 생명 길 영생의 길이라고 해도 아니다.
문둥이는 모든 것은 죽음으로 향한 것이고, 사람이 창조 때의 모습이 아니고 완전히 변형됐다. 그런데 때마침 예수님이 정확히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가니 고침을 받았다. 이러니 이제는 인간의 본 모습으로 인간 틈에서 연관구원을 가지며 살게 되는 거다. 누가 이렇게 고쳐주었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이 이렇게 고쳐주셨구나.
이제 예수 믿는 효력을 알 수 있겠느냐? 우리 모두 자기가 완전하냐? 다 똑바르냐? 정확하고 옳은 것만 가졌느냐? 하나님의 것만 가졌느냐? 세상 것을 가지고 믿음인양, 이건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