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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진실
민수기 19:1~10
모두가 다 잘 살자고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세상은 잘살지 않는 방향으로 치닫습니다. 각박한 삶에서 살뜰한 친구는 사라지고 매서운 경쟁자만 많아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정보다 경쟁에 익숙해집니다. 국제 사회도 그렇습니다. 한 나라가 잘 살려면 다른 어떤 나라는 잘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자기 나라가 잘 살려면 우리나라 분열이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국경선을 지우면 전쟁이 없어지고, 이 세상에 종교가 사라지면 평화가 도래한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애국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애국자가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종교 간 다툼도 없고 신학 논쟁도 없습니다.
얼마나 더 어둡게 부서져야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는 건가요
이해인님의 시 <평화로 가는 길은>의 일부입니다. 시에서도 보듯 삶은 단순하지 않고 명료하지도 않습니다. 한 줄기 빛을 얻기 위하여 부단히 부서지고 절망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픕니다. 복음도 이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복음은 역설의 진리를 포함합니다. 인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방법 말고 정말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걸까요? 진실의 길은 더디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본문은 정결수 만드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부정에 접촉하여 거룩을 상실한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 불살라 제사드리고 그 재로 정결수를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 제사장은 정화를 상징하는 백향목과 우슬초, 그리고 피를 상징하는 홍색 실을 불에 던졌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진영 밖에 보관하였다가 부정을 씻는 물, 곧 정결수를 만드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붉은 암송아지를 불사르는 과정에 참여하여 부정에 노출된 이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갈 것이라 그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19:7). 구약에서 거룩의 상징적인 존재가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도 부정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사장이 부정해져야 정결의 법이 효력을 발생합니다. 모순같아 보이는데 대단한 역설입니다. 제사장만 그런 게 아닙니다. 송아지를 불사른 자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옷을 물로 빨고 그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정결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정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체코 영화 <모스트>다리(2003, 보비 가라베디안 감독)는 배와 기차가 함께 지나다니기 위해 만든 개폐식 다리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기차의 승객을 살리기 위하여 기계실 레버를 당겨 다리를 정상이 되게 하고 자신은 기계에 빨려 들어간, 어린 아들을 희생한 아버지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기차의 승객들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슬픈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체 무심하기만 합니다. 누가 알든 모르든 이는 진실입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님은 답을 하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진정성 없는 질문에 침묵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답변입니다. 이를 이동파 화가 니콜라이 게가 그렸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주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깊은 침묵이야말로 정직한 답입니다. 교회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절망뿐인 광야 같은 세상살이에도 하나님의 계수함을 받은 자로서 희망의 삶을 잇는 형제와 자매에게 주님의 선한 이끄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있었기에 오늘 제가 생명을 누립니다. 한 줄기 빛을 위해 스스로 몸을 불사르는 촛불의 진실을 새기겠습니다.
찬송 : 266 주의 피로 이룬 샘물 https://www.youtube.com/watch?v=r57Rg9Cupak
2023. 4. 2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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