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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인구조사
민수기 26:1~51
“당신의 참여가 대한민국을 바꿉니다.” 이 표어는 2005년 인구조사를 하면서 내건 정부의 구호입니다. 우리나라는 5년을 주기로 인구조사를 합니다. 행정적인 기초 자료를 얻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하는데 인구 동태와 가족, 혼인, 경제활동 등 45개 항목을 조사합니다. 이는 표본조사가 아니라 전수조사이므로 국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국가 차원에서는 필요한 일이더라도 사생활이 노출되는 등 부작용과 논란이 많습니다. 2015년 조사에서는 한 시민이 위헌소송을 내기도 하였으나 법원은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인구조사는 어느 나라나 합니다. 성경에도 인구조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인구조사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삼하 24:1), 주님이 태어날 무렵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인구조사를 명령하여 나사렛에서 살고 있던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고향인 베들레헴을 찾았습니다(눅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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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는 두 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성경이 바로 <민수기>입니다. 첫 번째 인구조사는 민수기 1장에 기록되었는데 이때 이스라엘의 인구는 603,550명이었습니다. 이때가 출애굽 제2년 2월 첫날이었습니다. 그리고 38년간 시내 광야에서 유랑하다가 두 번째 인구조사가 본문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때의 인구는 601,730명이었습니다. 2차 인구조사는 출애굽 2세대로서 1세대는 거의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생존하기에 거칠고 고단한 광야 생활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인구는 크게 위축 되지 않아 다행입니다. 첫 번째 인구조사의 목적은 거친 광야 생활에서 부딪치게 될 적들과의 전쟁을 염두에 둔 조사입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의 목적은 곧 가나안 땅에 진입하여 각 지파의 숫자대로 땅을 나누기 위함입니다(26:53). 첫 번째 인구조사가 생존을 위한 조사였다면 두 번째는 정착과 번영을 위한 조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후 민수기에는 이스라엘의 반역이나 불평이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언급이 전혀 기록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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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조사 때와 비교하여보면 가장 크게 번성한 지파는 므낫세 지파입니다. 32,200명이 52,700명으로 무려 164%나 성장하였습니다. 가장 큰 지파는 유다 지파로 76,500명이었고, 가장 작은 지파는 시므온 지파인데 첫 조사 때 59,300명이던 인구가 22,200명으로 처음의 37%로 축소되었습니다. 아마도 바알브올 사건(25:1~15)에 분노하신 하나님이 전염병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실 때 바알 숭배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시므온 지파가 크게 위축된 듯합니다. 야곱은 단짝 형제인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 “그들을 야곱 자손 사이에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흩어 버릴 것이다”(창 49:7 새번역)고 하였는데 레위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에 흩어져 제사 업무를 맡으므로 야곱의 예언은 이루어졌습니다. 시므온은 모세가 죽기 전에 12지파에게 복을 비는 장면에서 생략되었습니다(신 33:6~25). 가나안의 땅은 사해 서쪽으로 유다 지파에 둘러 쌓인 지역을 분배받아(수 19:1) 유다에 나중에는 흡수되었다고도 합니다. 인구조사를 마친 후 그 결과를 공유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가 궁금합니다. 전 민족적으로는 인구 감소가 크지 않아 다행입니다만 각 지파 별로는 많은 성찰과 다짐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지난 삶을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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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구조사에 대하여 갖는 의문이 있습니다. 왜 어떤 인구조사는 하나님이 긍정하시는데 어떤 인구조사는 부정하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하여서는 그렇게 역정을 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삼하 24:1~15). 민수기 1장의 인구조사와 다윗이 행한 인구조사의 목적이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다른 점도 있습니다. 모세는 각 지파의 지도자를 통하여 인구조사를 한데 비하여(1:4, 30:1) 다윗은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를 맡겼습니다. 요압은 권력을 향한 욕구가 강한 자로서 인구조사를 9개월 20일에 걸려 하였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 전역에 전염병이 돌아 무려 70,000명이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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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절망뿐인 광야 같은 세상살이에도 하나님의 계수함을 받은 자로서 희망의 삶을 잇는 형제와 자매에게 주님의 선한 이끄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역경 중에도 변함없이 저희의 삶을 이끄신 주님께 감사올립니다. 받은 은총을 잘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계승하는 은혜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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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359 천성을 가는 성도들아 https://www.youtube.com/watch?v=wqhTqVpk5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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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5. 10 수
댓글 '1'
윤용 목사
[인구 변화의 이유]
(민수기 26:1-51)
1. 인구의 번화
민수기 26장은 두 번째 인구 조사의 기록인데,
첫번째 인구 조사 때와 두드러진 차이가 보인다.
시므온 지파의 인구 변화다.
첫번째 조사에서 시므온 지파의 인구는
59,300명이었다.
<민 1:23, 새번역> 시므온 지파에서 등록된 사람의 수는 오만 구천삼백 명이다.
그런데 두 번째 조사에서는 22,200명이다.
<민 26:14, 새번역> 이들은 시므온 가족이며, 등록된 이들은 이만 이천이백 명이다.
광야를 거쳐오면서 시므은 지파의 인구가
37,100명이나 줄어든 것이다.
2. 이유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은 알 수가 없겠지만
두드러진 이유가 발견된다.
<민 25:14, 새번역> 미디안 여자와 함께 죽은 그 이스라엘 남자는, 시므온 가문의 지도자인 살루의 아들 시므리이다.
시므온 가문의 지도자인 살루의 아들 시므리가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이스라엘 장막에 들어가 행음한 사건이 있었다.
이 행음과 우상숭배 사건으로
이스라엘백성 24,000명이 죽었다고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데,
그 사건과 하나님의 심판의 중심에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의 아들이 있었다.
죄가 지파의 몰락을 가져왔다.
죄로 인하여 시므온 지파는
가장 미약한 지파가 되고 말았다.
3. 죄에 대한 자세
죄가 나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왜 죄를 떠날 수 없을까?
왜 죄를 계속 행하며 죄 가운데 머물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기보다
죄인이어서 죄를 짓는다.
그렇다면 죄인이기에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어쩌면 죄를 피하기 어렵지만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한다.
얼마나 싸워야 할까?
죄와 얼마나 싸워야 할지
성경은 선명하게 말하고 있다.
<히 12:4, 새번역>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죄와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인생을 다 걸고서라도 죄와는 싸워야 한다.
죄에게 지면 삶이 몰락하기 때문이다.
4. 죄를 이기는 방법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죄인이
죄를 이기는 방법이 있을까?
1) 일단 행동으로 짓는 죄는 피해야.
주님이 말씀하셨다.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그러나 그 말은 '살인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해야 할 말이다.
눈에 보이는 죄를 지은 사람은 삶이 망가진다.
그 사람이 삶을 회복하려면
많은 고통과 아픔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그러니 일단 최선을 다해
죄 짓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
2)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 끝일까?
눈에 보이는 죄를 짓지 않는다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눈에 보이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가 있다.
교만과 정죄다.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교만과,
'너는 왜 죄를 지으면 그렇게 사니?'
라는 마음으로 죄 짓는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도
행동으로 죄를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죄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유명하다.
<눅 18:11, 새번역>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고도
행동으로 짓는 죄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정죄하셨다.
3) 그러면?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피흘리기까지 싸우면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적용하는 일이다.
<마 5:21, 22, 27, 28, 개정>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문제가 있다.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문제다.
음행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억제해 보겠는데,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살인하는 것은 억제해 보겠는데,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주님이 불가능한 요구를 하시는 것은 아닐까?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점진적 성숙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점진적 성숙을 이룰
자신만의 경건의 도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면에 주의 은혜가 채워져 가면서,
인격이 성숙해져 간다.
그에 따라 사람을 훨씬 덜 미워하게 되고,
음욕을 품는 마음도 점점 약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인격의 성숙과 신앙의 성장을 주도할
자신만의 경건의 도구를 꼭 하나 가져야 할 것이다.
5. 나는?
과거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엉망이었다.
나는 20대 때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다.
그때는 방황과 아픔과 갈등과 절망의 반복이
육체의 젊음과 생생함을 다 덮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 이 나이가 되었고,
다행히도 말씀 안에 거하면서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안정된 마음을
기적처럼 갖고 살아 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20대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나의 모든 성숙의 과정에는
단연코 말씀이 있었다.
먹고 살고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점점 마음이 거칠어지고 세속을 닮아가는 것을 발견했다.
말만 신자이지 실제로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매일 절망했다.
말 그대로 죽고 싶었다.
살기 위해 말씀을 붙들었다.
매일 아침 잠을 줄여 딱 한 시간을 만들어서
그 한 시간 동안 온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했다.
왜 그렇게 힘들고 바쁜 삶을 사는 중에
더 힘들게 말씀 묵상에 집중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앙적, 인격적 성숙을 이룰 방법이
말씀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
그 때 말씀을 생명으로 붙들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말씀으로 인하여 내 삶은
예전의 내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내 삶이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문제가 있고
부족함도 많은 상황이지만
내 삶에 대해 여전히 감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사실 제법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 문제들이
내 삶에는 산적해 있다.
그런데 나는 감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음이
새삼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삶에, 나의 내면에 이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은
단연코 말씀이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삶을 걸었을 뿐인데
말씀이 나의 내면을 만지고 내 성품을 만져서
주어진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주어진 상황이 쉽지 않음에도
말씀이 있어서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목사라서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목사이든 아니든 말씀에 삶을 거는 것만이
신자가 신자답게 성숙해갈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감사하게도 말씀에 삶을 거는 분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리고 교회 밖에서도 한 분 한 분 일어나고 있다.
목사로 살아가면서 말씀에 삶을 걸자고 외치고,
그 삶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뻘짓이 아님을
그분들의 고백을 통해서 확인하며 눈물 지을 때가 많다.
젊은 날에 그렇게 방황했던 나를
이렇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시고 이끄신
말씀이신 하나님을 온 맘으로 찬양하는 아침이다.
(민수기 26:1-51)
1. 인구의 번화
민수기 26장은 두 번째 인구 조사의 기록인데,
첫번째 인구 조사 때와 두드러진 차이가 보인다.
시므온 지파의 인구 변화다.
첫번째 조사에서 시므온 지파의 인구는
59,300명이었다.
<민 1:23, 새번역> 시므온 지파에서 등록된 사람의 수는 오만 구천삼백 명이다.
그런데 두 번째 조사에서는 22,200명이다.
<민 26:14, 새번역> 이들은 시므온 가족이며, 등록된 이들은 이만 이천이백 명이다.
광야를 거쳐오면서 시므은 지파의 인구가
37,100명이나 줄어든 것이다.
2. 이유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은 알 수가 없겠지만
두드러진 이유가 발견된다.
<민 25:14, 새번역> 미디안 여자와 함께 죽은 그 이스라엘 남자는, 시므온 가문의 지도자인 살루의 아들 시므리이다.
시므온 가문의 지도자인 살루의 아들 시므리가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이스라엘 장막에 들어가 행음한 사건이 있었다.
이 행음과 우상숭배 사건으로
이스라엘백성 24,000명이 죽었다고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데,
그 사건과 하나님의 심판의 중심에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의 아들이 있었다.
죄가 지파의 몰락을 가져왔다.
죄로 인하여 시므온 지파는
가장 미약한 지파가 되고 말았다.
3. 죄에 대한 자세
죄가 나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왜 죄를 떠날 수 없을까?
왜 죄를 계속 행하며 죄 가운데 머물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기보다
죄인이어서 죄를 짓는다.
그렇다면 죄인이기에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어쩌면 죄를 피하기 어렵지만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한다.
얼마나 싸워야 할까?
죄와 얼마나 싸워야 할지
성경은 선명하게 말하고 있다.
<히 12:4, 새번역>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죄와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인생을 다 걸고서라도 죄와는 싸워야 한다.
죄에게 지면 삶이 몰락하기 때문이다.
4. 죄를 이기는 방법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죄인이
죄를 이기는 방법이 있을까?
1) 일단 행동으로 짓는 죄는 피해야.
주님이 말씀하셨다.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그러나 그 말은 '살인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해야 할 말이다.
눈에 보이는 죄를 지은 사람은 삶이 망가진다.
그 사람이 삶을 회복하려면
많은 고통과 아픔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그러니 일단 최선을 다해
죄 짓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
2)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 끝일까?
눈에 보이는 죄를 짓지 않는다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눈에 보이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가 있다.
교만과 정죄다.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교만과,
'너는 왜 죄를 지으면 그렇게 사니?'
라는 마음으로 죄 짓는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도
행동으로 죄를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죄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유명하다.
<눅 18:11, 새번역>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고도
행동으로 짓는 죄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정죄하셨다.
3) 그러면?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피흘리기까지 싸우면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적용하는 일이다.
<마 5:21, 22, 27, 28, 개정>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문제가 있다.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문제다.
음행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억제해 보겠는데,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살인하는 것은 억제해 보겠는데,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주님이 불가능한 요구를 하시는 것은 아닐까?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점진적 성숙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점진적 성숙을 이룰
자신만의 경건의 도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면에 주의 은혜가 채워져 가면서,
인격이 성숙해져 간다.
그에 따라 사람을 훨씬 덜 미워하게 되고,
음욕을 품는 마음도 점점 약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인격의 성숙과 신앙의 성장을 주도할
자신만의 경건의 도구를 꼭 하나 가져야 할 것이다.
5. 나는?
과거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엉망이었다.
나는 20대 때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다.
그때는 방황과 아픔과 갈등과 절망의 반복이
육체의 젊음과 생생함을 다 덮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 이 나이가 되었고,
다행히도 말씀 안에 거하면서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안정된 마음을
기적처럼 갖고 살아 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20대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나의 모든 성숙의 과정에는
단연코 말씀이 있었다.
먹고 살고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점점 마음이 거칠어지고 세속을 닮아가는 것을 발견했다.
말만 신자이지 실제로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매일 절망했다.
말 그대로 죽고 싶었다.
살기 위해 말씀을 붙들었다.
매일 아침 잠을 줄여 딱 한 시간을 만들어서
그 한 시간 동안 온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했다.
왜 그렇게 힘들고 바쁜 삶을 사는 중에
더 힘들게 말씀 묵상에 집중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앙적, 인격적 성숙을 이룰 방법이
말씀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
그 때 말씀을 생명으로 붙들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말씀으로 인하여 내 삶은
예전의 내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내 삶이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문제가 있고
부족함도 많은 상황이지만
내 삶에 대해 여전히 감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사실 제법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 문제들이
내 삶에는 산적해 있다.
그런데 나는 감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음이
새삼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삶에, 나의 내면에 이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은
단연코 말씀이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삶을 걸었을 뿐인데
말씀이 나의 내면을 만지고 내 성품을 만져서
주어진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주어진 상황이 쉽지 않음에도
말씀이 있어서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목사라서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목사이든 아니든 말씀에 삶을 거는 것만이
신자가 신자답게 성숙해갈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감사하게도 말씀에 삶을 거는 분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리고 교회 밖에서도 한 분 한 분 일어나고 있다.
목사로 살아가면서 말씀에 삶을 걸자고 외치고,
그 삶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뻘짓이 아님을
그분들의 고백을 통해서 확인하며 눈물 지을 때가 많다.
젊은 날에 그렇게 방황했던 나를
이렇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시고 이끄신
말씀이신 하나님을 온 맘으로 찬양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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