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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하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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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역사적으로 구약 때는 제사장이 있는 성전으로 가야 한다. 회당에 가면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고 선생이 있다. 신약에는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성경을 가르치니까 교회로 가면 된다. 그러면 절간에 가면 하나님을 못 만나느냐? 하나님은 어디든 계시지만 교회로 가야 성경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러면 집에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늘 tv 앞에 있어야 하느냐? 성경을 손에 들어야 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중이나 마음을 알면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말씀을 귀담아들으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다. 말씀을 그냥 귀로 소리만 들으면 마음으로 들어가지지 않는다. 말씀이 인격화 성품화 되어지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세상의 소리, 인간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이러면 마귀의 유혹과 미혹에 당한다.
불신세상은 자식에게 돈을 물려주지만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물려줘야 한다. 자식에게 물질을 물려주면 자식의 정신이 망한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성경을 가까이할수록 자기의 귀 문이 열린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자기 귀 문이 안 열린다.
◆ 삼하:에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했는데, 다윗이 밧세바가 부정함을 깨끗케 했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세바가 목욕을 했기 때문에 깨끗하다고 하셨다는 건지, 아니면 다윗이 육신의 눈으로 밧세바를 쳐다본 마음이 죄 씻음을 받았다는 건지? 아이들이 흙탕물에서 놀다가 몸을 씻고 방에 들어오면 엄마가 보고 깨끗해졌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밧세바가 목욕을 했기 때문에 다윗 자기 보기에 밧세바가 깨끗하다고 한 거다. 즉 밧세바를 자기의 육적인 욕심대로 취하기 위해 신앙적인 용어를 붙여서 깨끗하다고 한 거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육의 눈으로 보고 칭찬하고, 깨끗하다고 하고, 더럽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말을 육의 개념으로 하는 건지, 영의 개념으로 하는 건지 잘 구별해야 한다. 다윗이 밧세바를 자기 욕심대로 취하기 위해 신앙의 말로 깨끗하다고 했고, 부정하게 취한 것을 숨기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을 계획적으로 죽였다.
그러니까 밧세바가 깨끗하다고 한 것은 하나님 앞에 깨끗하다는 게 아니라 자기의 욕정을 채우기 위한 죄성이 들어있는 말이다. 이 마음은 남이 못 본다. 목사님이나 성도들이 다른 사람을 말할 때 옆에서 이 말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모르면 그 말이 하나님 앞에 옳은 말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된다.
당시에 유대인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중에는 예수를 믿더라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고, 이 문제로 말다툼이 일어났다. 말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을 주장하는 것 이전에 서로 의사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서로 주장이 다른 일이 생기는 거냐? 한 마디로 절대적인 기준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쪽 사람이나 저쪽 사람이나 서로 절대적인 기준을 안다면 대립이 없다. 정답을 알면 대립이 없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거냐? 할례와 구원이 같은 거냐? 구원은 바로 그 사람의 성품에 관한 거다. 할례는 의식과 행동에 관한 거고, 구원은 할례나 의식과 관계없이 바로 그 사람에게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구원을 얻었으면 할례가 필요가 없는 거다. 할례를 받아야 지옥에서 천국으로 구원이 되는 게 아니다.
구약의 할례는 이방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하는 거냐, 믿음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하는 거냐? 후자다. 믿는 부모가 남자아이에게 하는 건데, 왜 남자아이에게만 왜 할례를 하는 거냐?
바울과 실라가 도를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밤에 기도하고 찬송을 하니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자 간수가 자다가 깨어서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서 자결하려고 했는데, 바울과 실라가 말렸고, 이에 간수가 이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이 집식구가 다 세례를 받았다.
그러면 왜 온 식구가 세례를 받은 거냐? 왜 온 가족에게 세례를 준 거냐? 구원은 누구로 말미암아 되는 거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된다. 그러면 세례를 받아야 지옥에서 천국으로 구원이 되기 때문이냐,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구원의 표식으로 세례를 받는 거냐? 후자다.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아야 천국에 가는 거냐,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는 거냐? 후자다. 구원 얻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결심으로 세례를 받듯이 할례도 구원을 얻기 위해 받는 게 아니라 구원 얻은 자가 불신자로 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받는 거다. 그래서 무할례시에 구원을 받았으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행동 이전에 ‘마음과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를 보고 말하는 거다. 그래서 행동 이전에 마음과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이게 순종의 행동으로 나올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된다. 왜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믿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왼쪽에 있는 자와 오른쪽에 있는 자를 말씀하시면서 알게 해 주셨다. ‘순종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심행에서 결정된다. 하나님은 ‘심행이 세상을 붙들고 나온 거냐, 진리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나온 거냐?’ 하는 것을 보신다. 그다음에 행동이나 활동은 그 사람의 상황이나 사정이나 환경에 따라 나오기도 하고 안 나오기도 하는 거다.
자기 마음이 진리말씀을 붙들고 있으면 이 사람의 상황이나 사정이나 환경에 따라 심행이 나와도 믿음이고 안 나와도 믿음이다. 나와도 구원이고 안 나와도 구원이다. 즉 심행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어도 행동은 상황에 따라 안 나올 수도 있는데 이것도 믿음이다.
행동을 기준으로 ‘순종이다, 불순종이다. 믿음이다, 믿음이 아니다’ 하게 되면 건강하고, 힘 있고, 돈 있고, 시간이 많은 사람만 말씀에 순종할 수 있으니 이렇게 되면 가난하고 몸이 아픈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행을 보시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는 것은 부자로 살아도 할 수 있고 가난하게 살아도 할 수 있는 거다. 심행에서 이게 좌우된다. 그래서 사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 심행을 보시고 역사하신 거다. 성령님은 행동이나 활동에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을 보고 역사하신다.
◆ 단:에 천사장 미가엘이 다니엘에게 올 때 바사군의 방해를 받아서 늦게 왔다고 했다. 바사군은 사람이고 미가엘은 천사다. 미가엘은 사람의 눈에 안 보이고 물질이나 시간과 관계가 없는 존재다. 물속으로 갈 수도 있고 벽을 뚫고 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장소 초월, 시간 초월이다. 그런데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 바사군이 이런 천사를 막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귀신이 불에 들어가면 타서 죽느냐? 구름에 들어가면 숨이 막혀서 죽느냐?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죽이지 않고 쫓아냈다. 쫓겨난 이 귀신이 공중을 빙빙 돌다가 누구 속에 들어가겠느냐? 마음과 정신이 돼지 같은 욕심쟁이에게 들어간다. 그런데 귀신 자기 마음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허락하에 들어간다. 귀신이 들어가면 귀신이 들어간 사람은 자기에게 귀신이 들어간 줄을 모른다. 또한 다른 사람도 이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밝혀놨기 때문에 안다.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가는 거다. 믿는 사람 속에 이 마음 대신 귀신 들린 정신이 들어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정신을 쫓아내신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본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욕심은 없고 여전히 귀신 들린 정신으로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고 싶으냐? 그러면 귀신 들린 채로 살아라. 사람이라면 인격이 고상해야지 인격성이 짐승과 같다면 이게 사람이냐? 이러면 하나님께서 불로 쓸어버린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기를 구원목적으로 하나님의 제 일의 사랑의 대상자로 만들어 놨으니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 중에 참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것을 하나의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 적중성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 삶이 자기의 구원이 되는 거고, 이게 순종이고,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다.
◆ ‘노아의 후손들은, 셋의 후손들은 몇백 년을 살며 자식을 낳고 몇 살에 죽었더라’ 하는 게 나오는데, 가인의 후손들은 이게 없다. 같은 사람인데 왜 노아나 셋의 후손들은 이게 있고, 가인의 후손들은 없는 거냐? 가인은 자식을 낳지 않았기 때문이냐? 가인도 자식을 나았는데 왜 가인에게는 없는 거냐?
우리의 믿음의 족보는 하나님의 족보에 들어있다. 그런데 같은 사람인데도 하나님의 족보에 없는 사람도 있다. 부자로 세상을 누리며 살았지만 하나님의 족보에 없는 사람이 있다. 이게 무엇을 말하는 거냐?
우리의 믿음성이 하나님의 족보에 올려졌고, 또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우리의 믿음의 족보에 하나님이 들어있다. 마:의 족보가 이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현상세계에 사는 가운데서 이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건데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영의 눈이 어두워서 눈에 보이는 면에 자극되어 육신 위주로 살고 있다.
실상적인 구원은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데서 되어지는 거고, 이게 현재 자기의 삶이고, 자기의 수준이고, 가난하거나 부요자로 되어있는 거다. 누가 만들어준 게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대로 된 거다. 이걸 부정하고 살면 예수를 믿어도 불신성이다.
우리가 현상세계에 사는 동안에 실상적인 존재로,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천국에서 영광자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 땅에서도 기쁘고 행복하고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당에 왔다 갔다만 하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인격화 자체화 실상화 되어야 한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성품성이 우리 마음 가운데서 역사가 되고 있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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