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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0:3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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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배장섭 목사 |
참고 : |
영적 전쟁의 승리비결(3):신앙고백과 인내
본문말씀 히브리서 10장 32-39절
1. 서론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해야 되는데, 정통 개혁주의 교단들의 교리들을 보면 정확하게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 없는 마치 뜬 구름 잡는 식의 주장들이 많습니다. 그래 가지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자, 예를 들어 율법순종을 부정한 이신칭의 같은 경우에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지만 그렇게 의롭게 함을 받게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구원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신칭의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해 놓고 거룩해져 가다가 죽어서 완전성결하게 되어 천국 간다는데, 그러면 의롭게 되는 것은 무엇이고 성화의 과정은 또 무엇입니까? 뭐 그것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지금 내가 성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면 어느 정도 성화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러다보니 설교를 들어보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 정확한 분별 기준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저 마냥 ‘은혜’만 강조하다 보니 눈물 콧물을 찔찔 흘리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모릅니다. 심지어 이랬다, 저랬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이신칭의로 구원 받는다면 그렇다면 세례는 왜 행하는 것입니까? 아니 세례 없이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 또 이신칭의로 천국 간다면 살인을 범해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이지만 이 둘은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통 개혁주의 교단들의 현실입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는데,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영적 전쟁의 세 번째 승리 비결 : 신앙고백과 인내”라는 제목으로 그 점을 함께 생각해 봄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데요.
2. 본론
우선 먼저 35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무슨 뜻입니까?
‘큰 상’이란 36절에서 말씀하신 ‘더 낫고 영구한 소유’라고 말씀하신 천국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천국을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느냐 하면 이신칭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만 ‘담대함’을 가지면 되는 것이 아니고 줄곧 ‘담대함’을 유지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실 ‘담대함’이라고 번역했지만 번역상의 문제가 많습니다. 원문에 보면 “팔레시아”라고 해서 ‘용기’라는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함축적으로 포함된 것이고, 원래 이 말은 ‘숨김없이 말함, 말의 솔직함, 확고한 평판을 얻게 된 사람의 태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단순히 담대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예수님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연후에 그 다음 32-33절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서 10장 9절에 보면 새 언약의 ‘믿음의 의’인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그런 신앙고백적인 삶을 버리지 않고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비로소 천국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 알아서 인도해 주시는 그런 구원의 서정이라고 생각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고 안이하게 신앙생활 했다가는 사탄의 밥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다시 말해서 옛날 일제 강정기 때나 6.25 사변 때에 총칼을 목에 들이대면서 ‘예수 믿으면 죽인다’고 협박해도 끝까지 부인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바로 나의 주인이시라는 신앙고백적인 삶을 살아야 종국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사참배에 가담하는 것은 우상숭배에 해당되는데, 그런 분들도 비록 신사참배에 가담하고 예수를 부인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천국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렵다고 봅니다. 왜?
물론 ‘나중에 회개하면 되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요한일서 5장 16절에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무슨 뜻입니까?
‘성령 훼방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무조건 어떤 죄를 범하든지 회개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보면 살인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상숭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이나 성도들은 신사참배하는 사람들처럼 그런 머리를 굴릴 줄 몰라서 끝까지 미련하게 “그래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버티다가 핍박을 받아 죽어갔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고난과 도전에 대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왕이시오, 주인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적인 삶을 살기 어렵거든 애초 신앙생활하지 않는 것이 본인에게 더 유익합니다. 아니 지금이라도 그만 두는 것이 더 낫습니다.^^ 왜?
그래야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이라도 마음껏 하다 죽을 수 있는데, 중간에 포기할 것 같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 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못하겠다면 애초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자, 그 다음 36절에도 보세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신칭의는 그냥 무조건 믿기만 해야 된다는데, 뭐라고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 다음 말씀에 보면 그 이유를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뭐라고요? ‘하나님을 뜻을 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는 말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원문에 보면 목적을 이끄는 부사절을 썼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요? ‘인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보세요. 지금 우리는 초대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앙생활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힘든 도전과 어려움에 직면해도 어떻게? 곧 잘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믿어도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는 신신당부했습니다. 바울은 원망할 줄 몰라서 원망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렇게 원망하고 불평할 것 같으면 애초 신앙생활하지 마세요? 그것이 본인에게 더 유익할 것입니다. 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놀라운 은혜로 출애굽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가야만 했습니까? 불평, 불만,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후서 2장 21절에 보면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는데, 무슨 뜻입니까?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20절에 보면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다가 타락하게 되면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더 추악한 삶으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될 것 같으면 애초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지금은 초대교회 때보다는 많이 낫다고 할까?^^ 그런데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구원론을 연구해 보면 사탄 사상으로 변질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말씀하신 일곱교회에 대한 책망에서 피해갈 수 있는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정말 목숨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돈 앞에, 명예 앞에 무너지지 않는 성도들을 본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에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렇기 때문에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일사각오의 정신, 즉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필요하기 때문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3. 결론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하는데요.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 사업을 하던 중에 자기 군사보다 몇 배가 더 많은 어느 난공불락의 성을 공격 한 번 하지 않고 항복을 받아 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흔히 방어하는 것보다 공격이 힘들기 때문에 몇 배의 군사력이 필요하지만 방어하는 군사보다 훨씬 적은 군사를 끌고 와서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협박하고 있으니 성을 지키는 군주나 군사들이 우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항복을 외친 알렉산더 대왕이 뒤로 돌아서서 자기 군사들을 향하여 ‘좌향좌 앞으로 가’라고 외치자 그 구령에 맞추어 군사들이 일제히 좌향좌를 하더니 앞으로 가는데, 문제는 그 앞에 천 길 낭떠러지가 있었지만 그 앞에 다다르자 알렉산더 대왕이 ‘멈춰’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내 버려 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낭떠러지 제일 앞에 있는 군인들이 우왕좌왕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행군을 멈추지 않고 그냥 낭떠러지로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 조금 있다가 '멈춰'라고 명하자 일제히 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성주가 즉각 성문을 열고 백기를 들고 투항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명령에 따르는 군사라면 시간 싸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 사실을 알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는데, 거기에 비해 바울은 로마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부르셨다고 했습니까? ‘의의 군사’로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 대왕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의의 군사로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조그만 도전에도 원망하고 불평하며 한 마디로 나약해 빠진 군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 군사들을 가지고 무슨 전쟁에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의의 군사라면 적어도 알렉산더 대왕의 군사보다 더 나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하나님의 군사들은 한 마디로 오합지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없을까요? 그것은 잘못된 이신칭의와 같은 교리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원망 불평해도 괜찮다나 어쨌다나? 과연 하나님이 그런 나약해 빠진 자기 연민에 찌든 성도를 기뻐하실까요?
여호수아 1장에 보면 민족의 지도자 모세 다음으로 세움을 받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강조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행하되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왜?
겁을 먹으면 싸워보지도 않고 패할 수밖에 없지만 일사각오의 정신을 가지고 싸우면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디 사탄 마귀 권세가 조금도 범접하지 못하는 일사각오의 정신을 가진 의의 군사가 되어 반드시 영적 전쟁에 승리하시므로 약속하신 놀라운 복을 받으실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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