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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복음 전도]
1. 이 글은 학술적인 글이 아니라 개인의 느낌을 적은 짧은 단상이다.
2. 굳이 이런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나 한 사람이라도 이런 글을 하나쯤 남겨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몇 자 적는다.
3. 최근 몇몇 대형 교회가 중심이 되어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빌리그래함 50주년 기념 대회>를 열었다는 뉴스를 읽었다.
내 느낌은, 한국교회에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이벤트를 여전히 돈 많고 힘 센 큰 교회들이 주최했구나 싶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주최측은 행사의 성공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겠지만, 제3자인 내 눈에 비친 모습은 그랬다.
4. 이번 행사는 50년 전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던 빌리그래함 초청 집회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3년 5월 30일에서 6월 3일까지 20세기가 배출한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 빌리그래함 목사를 초청해서 여의도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당시 연인원 440만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번 행사는 그때의 감격을 기억하고 되살리기 위한 것이리라.
하지만 50년 전 여의도 광장에 대규모의 군중을 모아놓고 했던 방식으로, 오늘날 다수의 교인을 동원하여 기념 대회를 여는 것이 '복음 전도를 대하는' 한국교회가 취할 최선의 방식일까?
작금의 현실이 그걸 인정하고 용납할까?
5. 내 개인적으로 1970년 이전의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하는 찬송가를 딱 하나 꼽으라면 주저없이 <멀리 멀리 갔더니>를 꼽고 싶다.
1.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후렴)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2. 예수 예수 내 주여 마음 아파 울 때에
눈물 씻어주시고 나를 위로하소서
3.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존하소서
4. 대략 1900년부터 1970년 대까지 한국인들이 처한 가장 극명한 실존은 '멀리 멀리 떠난' 삶이었다.
-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잃고 만주와 연해주로 떠난 삶
-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혹은 수도권에서 부산 등으로 피난을 떠난 삶이었다.
-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던 시기였다.
이렇게 당시는 자신의 뿌리와 같은 삶의 터전을 등지고 '멀리 멀리 떠난' 인생들에게, 예수의 복음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교회'가 이렇게 집 떠난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의 애환을 함께 나누는, 사회적 약자들의 공동체로 기능하고 존재했던 시기였다.
5. 그러나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를 통과하면서 한국 개신교의 '자기 인식'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첫째, 1973년에 시작된 빌리그래함 초청 집회를 필두로, 몇 년에 한 번씩 여의도광장에서 수백 만 명의 신도들을 모아놓고 집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한국교회는 스스로 '힘 센' 종교라는 자의식을 갖게 된다.
둘째, 서울 강남 지역 개발과 궤를 맞춰, 사회 엘리트들이 출석하는 초대형 교회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그들을 중심으로 '힘 세고 잘 나가는' 교회라는 자의식이 공고해지기 시작한다.
6.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 개신교는 소위 '크리스텐덤' 의식에 사로잡힌다.
'크리스텐덤'이란 약 1,500년 간 서구사회를 지배했던 '기독교 제국'혹은 '기독교 세계'에 대한 의식이다.
이 시기에 서구 교회는 세상을 힘과 법으로 다스리는 '강자' 의식으로 충만했다.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었고, 우주 질서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그 폐해가 만만치 않았다.
반면, 한국인의 종교 역사에서 개신교는 가장 늦게 들어온 '손님'이었다.
그리고 손님이 묵어가는 '사랑방'이 개신교의 위치였다.
하지만 1970년 이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급격히 덩치가 커진 개신교는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한국사회 안에서 '안방'을 차지하고자 했다.
1970년대 이후 한국개신교의 자의식은, 형식적으로는 '민족 복음화'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한국사회 안에서 가장 힘 센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분출에 머무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보다 큰 건물, 대규모 군중집회, 무례한 복음 전도, 초코파이와 햄버거를 앞세운 진중 세례, 정치인들과 어울리는 조찬 기도회 등이 따지고 보면 다 그런 자의식의 산물이었다.
7. 하지만 한국 개신교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서구사회가 1,500년에 걸친 교회의 폭주를 계몽주의를 통해 브레이크를 걸었다면,
한국교회는 불과 30년 만에 '옥상'에서 '지하실'로 추락했다.
한국의 시민 사회는 '힘 센' 종교를 지향하고 욕망하는 한국개신교에, 처음에는 극심한 피로도를 호소하다가, 급기야는 '개독교'로 지칭하며 조롱하고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8. 물론 1973년에 여의도에서 수백 만의 청중을 앞에 놓고 복음을 설교하던 빌리그래함 목사가, 오늘의 한국개신교의 상황을 예측하거나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50년의 세월이 지난 작금에 보니, 1970년대 초반부터 한국교회에 광풍처럼 불어닥친 대규모 집회가 한국개신교를 망친 주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고 나는 생각한다.
차라리, 모든 것이 숫자로 환산되는 통계에서는 더디가더라도, 교회가 오늘까지 계속해서 '집 떠난 자들'의 곁에서 그들의 애환과 눈물을 닦아주는 '약자들의 공동체'로 남았더라면, 지금 한국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사뭇 궁금하고 아쉽다.
9. 따라서 나는 이런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진 초대형교회들이 주축이 되어 50년 전의 대규모 복음전도 집회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사가 불편하다 못해 못마땅하다.
물레방아가 흘러간 물을 못 되돌리듯이, 그런 식의 이벤트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10. 한국교회는 다시금 '전도'의 동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교회 자체의 존립이 걱정이 되는 시기에, 외부인을 전도해서 교회 내부로 초청하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정말 '한 영혼'을 사랑해서 전도를 하기 원한다면, 내 생각에 그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교회가 우리 사회의 밑바닥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집을 떠나 멀리 멀리 온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의 땀을 닦아주고, 눈물을 씻어주며, 옷을 빨아주는 것이다.
어떤 행사나 이벤트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일 대 일'로 신실한 관계를 맺으며 성심껏 섬기는 것이다.
교회의 희망은
교회가 힘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신이 가진 힘을 모두 나눠줘서, 교회야말로 이 사회에서 가장 힘이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데 있다.
한국교회가 과연 그렇게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내 대답은,
글쎄요다.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 현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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