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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로마서 6:15~23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야로센코(1846~1898)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출신의 군인으로서 19세기 말 암울한 러시아 상황에서 희망을 그린 화가입니다. 그는 18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군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동시에 이동파 미술의 개척자 이반 코람스코이(1837~1887)의 드로잉학교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하고, 이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의 청강생이 되어 미술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지만 역사는 그를 화가로서 더 기억합니다. 특히 그는 왕과 귀족을 위해 봉사하던 미술을 민중의 미술이 되게 한 이동파의 적자입니다. 그는 미술을 통해 당시 러시아 사회의 불합리한 사회 모순에 의문을 제기하고 답을 요구하였습니다. 고뇌하는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그렸고, 노동자와 군인 등 사회 저변의 인물을 화폭에 담아 인간미와 인간 긍정을 추구하였습니다.
그의 작품 <죄수>(1878)는 독방에 갇힌 한 남자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독방에 갇힌 것을 보아 사상범이거나 혁명 사범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한 평 남짓의 독방이 희망의 세상을 추구한 결과라니 인생이 너무 간고하고 슬픕니다. 모름지기 그의 행위는 죄를 물을 것이 아니라 상을 물어야 옳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선과 악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없는 죄를 만들어 희생양을 삼거나 침소봉대, 작은 죄에 큰 벌을 부가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왜곡 일삼기를 예사로 합니다. ‘정의사회 구현’을 표어로 내걸고 불의 사회를 구현하는 모습은 인간성이 얼마나 사악한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언어학자 촘스키(1928~ )의 말이 생각납니다. “누군가 자유를 반복하여 외친다면 의심하라. 그 반복만큼 당신의 자유는 제한받을 것이다.”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닙니다.
독방에 갇힌 남자는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향하고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원망과 분노은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가느다란 희망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봅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신영복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그는 무기징역형을 살면서 ‘왜 자살하지 않고 기약 없는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가?’를 자문하였습니다. 그 이류를 ‘햇볕’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서 최대의 크기가 되엇다가 맞은 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갑니다. 신문지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절정이었습니다. ”(신영복, 《마지막 강의-담론》, 425쪽) 그는 그 ‘햇볕’을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로 규정합니다.
사람에게 죄는 숙명입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은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범죄하였기에 스스로 개과천선한다고 해서 죄를 씻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그런데, 신영복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햇볕’이 되어 주십니다. 사람은 절망할 때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을 때 멸망합니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포기하므로 멸망합니다.
삶과 믿음의 기초가 흔들리는 세상살이에서도 변함없는 믿음의 길을 따라 오롯이 사는 주님의 백성에게 반석이신 주님의 안전 보장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희망의 빛이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세상 죄와 절망이 제아무리 짙고 깊어도 주님이 희망이 되어 주신다면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 삶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할렐루야!
찬송 : 438 내 영혼이 은총입어 https://www.youtube.com/watch?v=yOol9P0bxmY
2023. 6. 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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