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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있습니다”
로마서 9:19~29
종교가 모든 문제에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욥기>에서 보듯 착하게 산다고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악행을 저지른다고 벌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악을 행하는 자들이 형통하고 반역자가 평안하는가 하면 의로운 자들이 고난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 까닭을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렘 12:1). 예레미야는 정의의 문제를 질문합니다. 예레미야 같은 질문은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하고 지금도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한다고 신성모독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대답을 하시지만 언제나 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침묵도 하나님이 대답하는 방식입니다. 사람은 질문을 하고, 하나님은 질문을 용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 질문하는 존재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노예나 기계처럼 입력된 명령을 수행하는 비인격적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말의 의미인 인격적인 존재라는 뜻은 질문할 수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도리어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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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질문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도를 지나쳐서 따지듯 대들거나 대거리하는 태도는 본분을 망각한 태도입니다. 질문을 할 수는 있으나 불손한 태도로 말대꾸 하거나 악의적으로 반문하는 행위는 자신의 신분을 벗어난 일입니다. 게다가 예레미야처럼 ‘정의’를 질문하지 않고 ‘은혜의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당혹스러워하십니다. 은혜와 사랑은 수용하여 감사에 이르는 법이지 따지듯 ‘왜 나를 사랑했오?’하며 대거리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에 사람의 의지가 무시되는 듯하여 혹자는 불편합니다. 인류 구원과 관련하여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 하신다면 그러면 사람인 나의 역할이 간과된 듯하고 객체화된 사실이 유쾌하지 않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죄인의 습성이 남아있는 탓인 듯합니다. 신앙에는 신비가 존재합니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교리가 있고,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즉답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침묵으로 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 사람아, 그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토기장이에게,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9:20~2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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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관련하여 사람이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는 할 일이 태산입니다. 구원의 은총을 삶으로 살아내는 일은 아주 중요하고 큰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신적 사역이지만 구원 이후의 사역은 전적으로 인간이 주도합니다. 이때야말로 질문할 때입니다. “하나님, 미신과 우상을 숭배하고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는 지도자를 대부분 그리스도인이 지지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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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의 기초가 흔들리는 세상살이에서도 변함없는 믿음의 길을 따라 오롯이 사는 주님의 백성에게 반석이신 주님의 안전 보장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어제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은 주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오늘 여기서 살아내는 저희에게 질문이 많습니다. 영원의 구원을 시간 안에서 살아내는 저희에게 질문은 곧 기도입니다.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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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68 오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시니 https://www.youtube.com/watch?v=vC7nglEj5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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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 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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