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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계1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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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믿음이 있네, 없네. 누가 맞고 누가 틀리네’ 이게 문제가 아니라 먼저 옳은 진리이치를 알아야 한다. 먼저 잠을 깬 사람이 먼저 일어나서 활동하듯이 먼저 깨닫는 사람이 신앙 면에서 먼저 일어난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도 안 나고 세상 썩은 냄새만 난다면 이 사람의 신앙은 죽은 거다. 이러면 교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쓸모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구원을 위해 세상을 만드셨는데,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아담과 하와라고 하는 인간을 만들어 놨는데, 아담과 하와가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을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쓴다. 그만큼 풍부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마음대로 써 보라는 거다. 그리고 선악과는 먹지 말고 생명과를 먹으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세상에 있는 먹거리를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고, 같이 섞어서도 먹어보고, 삶고, 부치고, 기름을 쳐서 맛있게 먹듯이 세상 것을 이용 사용 활용해서 영적인 면의 건강을 이루고 영적인 능력자가 되게 하려는 거다.
아담이 가족들에게 이 정신으로 교훈을 하면 아담의 집이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고 구원이 되게 되어있다. 그런데 생명과는 안 먹고 선악과를 먹었다. 선악과를 먹은 여기에는 세상 마지막 때까지 개인이든 단체든 나라든 모든 죄라고 하는 죄가 다 뭉쳐져 있다. 그래서 이것을 풀면 세상 마지막 때까지 개인적으로 지은 죄도, 온 인류가 지은 죄도 다 들어간다. 또한 세상 마지막 때까지 선악과를 따먹은 정신에서 나온 사고방식과 소원 목적과 이해타산에서 되어지는 전쟁이나 예술이나 정치 등도 다 들어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요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받은 존재인데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미리 택자와 불택자를 정해서 인간세상에 태어나게 하신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택자나 불택자를 말할 때 원인을 놓고 하는 말이냐, 결과를 놓고 하는 말이냐? ‘누가 택자이고 누가 불택자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고 우리 인간은 이것을 교훈적인 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시간 속에 들어있고, 시간 속에 들어있는 것은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고, 왔다가 지나간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눈에 보이는 물질개념으로 되어있으면 이 사람의 정신도 물질목적으로 들어간다. 신앙을 물질기준으로 말을 하는 것은 인간 네 생각이고, 인본주의 사고방식이고, 하나님보다 사람이 먼저 나가는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이런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성경을 둘러씌워서 말을 하는 것에 속으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마귀로부터 세 가지 시험을 받고 이겼는데, 세상 마지막 때까지의 모든 죄의 종목이 이 세 가지 시험 안에 들어있다.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광야로 나가서 시험을 받고 이긴 정신과 사상을 안다. 이 정신과 사상을 모르면 예수님께서 세 가지 시험을 이겼다고 하는 표면적인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친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에는 세상 마지막 때까지 모든 인류가 받을 시험이 대표적으로 들어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 세 가지 시험 중에 하나에라도 지면 다른 시험에도 진다. 십계명 하나에라도 걸리면 다 걸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세 가지 시험을 받고 이겼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자기가 정신과 사상 면으로 죄를 짓더라도 이게 죄로 보이지 않게 된다. 주님께서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향해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이 말씀에 자기가 걸려있어도 이게 안 보인다.
계:에 큰 성 바벨론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담 타락 이후로 인간세상의 모든 죄가 흘러내려 오면서 세상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정도로 죄가 팽배해진 상태를 말하는 거다. 즉 세상 마지막 때의 교회를 말한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어떤 역사가 전개되었던 세상 마지막에는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하는 죄악 덩어리가 심판받고 무너지게 된다.
이것은 교회에 주는 말씀이고, 교회라고 할 때는 목사부터 먼저 들어간다. 먼저 깨달은 자가 다른 사람을 세우고 옳은 곳으로 인도할 수 있다. 법보다 앞선 게 성령에 감화 감동된 양심인데, 목사가 액면적 표면적 제도적 껍데기를 가지고 교회를 하면 이 양심이 없어진다. 그러면 이런 목사가 어떤 교훈을 하겠느냐?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시대가 되면 믿는 사람은 많은데 진리본질로 믿는 사람이 극히 드물고 타락된 양심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한다는 거다. 믿음 안에는 인격과 성품과 사고방식이 다 들어있는 건데 이게 세상화 물질화로 된다는 거다. 믿는 사람은 성령에 감화된 양심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없다는 거다. 그러니 말세가 되면 제도만 밟고 돈만 있으면 아무나 목사가 되는 거다. 심지어 성경을 안 읽고도 목사가 된다.
말세가 되면 큰 성 음녀교회 바벨론이 나타나는데, 없었던 게 말세가 되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성경 속의 에덴동산이나, 노아홍수나, 니므롯이나, 아브라함이나, 롯 등으로 내려오면서 한 편으로는 신앙의 구원계대가 내려가고, 한 편으로는 세상 속화되고 타락된 선악과의 사상으로 내려오다가 말세가 되면 본질적인 신앙자는 극히 적고 이질적인 신앙자들이 많아지면서 이질적인 자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되니 이것이 큰 성 바벨론으로 나타나는 거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설계한 대로 되는 거다.
계:에 머리가 일곱 개요 뿔이 열 개가 달린 짐승이 나오는데, 이것은 마지막 시대의 음녀교회를 말한다. 세상으로 속화된 교회는 선악과를 먹은 사상으로 돌아가는데, 이런 게 다 사상적으로 보면 머리가 일곱 개요 뿔이 열 개가 달린 짐승이다. 또한 단:에서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창세 이후로 인간들이 사는 소원과 목적을 말해주는 거다. 사람이 아무리 높이 올라가더라도 금 이상은 못 올라가고, 또한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린다’고 했으니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아무리 높이 올라간 것이라도 다 깨지고 무너진다.
세상에서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선악과의 소원 목적을 가졌으면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사망운동을 한다. 이 마음이 느부갓네살 왕의 속에도 들어있고 오늘날 타락된 목사나 교인 속에도 들어있다. 이것은 심판받을 금 머리다. 금 머리까지는 못 올라가더라도 이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다 심판이다.
세상사람들은 다 금 머리가 되려고 하지 금보다 못한 은 가슴이나, 은 팔이나, 놋 넓적다리나, 철 종아리나, 철과 흙이 섞인 발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맨 아래의 발가락으로 살아야지’ 하는 사람은 없다. 다 머리로 살려고 하지 종이나 노예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 속에 들어있는 이 속성이 왕이다. 큰 성 바벨론 안에는 이런 사상으로 커진 자들이 들어있다.
타락된 교회도 이런 사상으로 점점 커지는 것이라서 이게 시대마다 특성적으로 솟아난다. 그래서 목사마다, 교회마다 특성적으로 나가는 거다. 이게 안 보인다면 이 사람은 성경을 역사적 표면적으로만 보는 거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는 모를지라도 성경의 인물이나 사건의 성격과 성질과 소원 목적을 봐야 자기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 앞에 거짓된 성질을 알게 된다.
다니엘을 통해 이방나라인 바벨론, 메대, 파사, 헬라, 로마가 패망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나라들이 누구다. 무슨 왕이다’ 하고 보지 말고 왕들의 정신을 보고 지금의 내 속에는 그런 이방정신이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맨 나중의 로마의 왕이 열 자식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런 자들이 나타나서 잠깐 다스리다가 없어진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사역을 하고 승천하신 이후에 로마의 왕과 교황이 얼마나 싸우느냐? 이건 교권과 세권의 싸움이다. 세권이 교황을 세울 때가 있었고, 교황이 왕을 세울 때가 있었다. 그러나 잠깐 다스리다가 없어진다고 했듯이 이것도 잠깐이다. 껍데기인 그 역사도 잠깐이고, 그 사상들도 잠깐이다. 옛날에 있었던 그 사람들의 정신과 사상이 지금도 사람 속에서 사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이것도 잠깐이다.
그리고 계:에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일곱 머리에서 여덟째 왕이 나오지만 곧 멸망하는데, 일곱 머리란 왕을 말하고, 지도자를 말하고, 대표자를 말하는데, 일곱 왕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에서 여덟째 왕이 나온 거다. 그리고 ‘일곱 나라를 붙잡고 권세를 받아’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이 여덟째 왕은 일곱 왕과는, 즉 눈에 보이는 로마가 철권으로 통치하는 것보다 더 막강하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으로 봐야 한다.
여덟째 왕으로부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들어있는 죄악 된 사상이 총체적으로 나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사람들 속에 있다가 세상이 심판받을 때 불 속에서 사라질 큰 음녀 바벨론이다. 바벨론은 사상적으로 혼잡 혼성 혼돈이라서 생명의 도가 없다.
이 바벨론 사상의 운동의 성질이 666이다. 세상 끝날 때까지 종교적 문화적 예술적 과학적 정치적으로 인본주의 사상이 최대로 충만케 되는데, 이게 666이다. 그러나 이 666은 아무리 올라가도 하나님의 본질인 7로는 안 된다. 이 성질은 7(하나님의 것)이 아니라서 바벨론이 불에 탈 때 같이 탄다. 지옥에 간다는 게 아니라 이런 666의 정신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다.
적그리스도는 666의 성질이라서 예수님의 일에 대적한다. 이게 커지면 진리 성도들과 싸우려고 한다. ‘내가 너희의 적이다. 나와 싸우자’라는 말은 안 하더라도 성도들에게 비진리를 주면 이것은 666의 성질이라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다. 내가 이것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상대보다 옳은 진리이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옷을 벗고 다니지 말아라. 부끄러움을 드러내지 말아라’고 하는 것은 진리로 무장하라는 거다. 그래야 이긴다.
또한 계:에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라고 했는데, ‘용의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것으로 높아진 권세를 말한다. 타락되고 속화된 교회는 어떤 생각을 해도 이 용의 사상에서 벗어나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용은 실물이 없는 존재지만 사람 속에 용의 운동의 성질이 들어있으니 교회에서는 이 성질과 소원 목적을 가르쳐 주고 뽑아내게 해야 한다.
아무리 목사라고 해도 기존적이고 타락된 성격과 성질의 뿌리가 들어있으니 이게 예수님의 것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걸 아느냐? 자기가 이런 게 구별 분별이 됨과 동시에 ‘이건 아니다’ 하면 인정정실이나 물질성이나 육신의 생명성을 초월해서 그 교회를 떠나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교회에서 어떤 면에 정이 들어있으면 그곳이 나쁜 줄 알면서도 나오지 못한다.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이리저리 저울질하는 것은 네가 할 일이 아니고 너는 옳은 것, 바른 것만 따르면 된다. 반면에 어느 교회에 다니건 그곳에서 깨닫고 자기가 변화된 게 느껴지면 그곳에서 나오면 안 된다.
십계명에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했고, 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당신을 먼저 사랑하고 제일 첫째로 여기라는 거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를 살려주려는 거지 인간의 형편이야 어떻건 당신만을 위하라는 말이 아니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살고자 한다면 구덩이 위에 있는 사람의 손을 붙잡아야 한다.
소원 목적적인 면에서 진리이치를 바로 가지지 못하면 이 사람은 넘어진 거다. 우리는 진리이치를 어기면 안 된다. 진리이치를 모르면 인간이 앞서게 된다. ‘네가 그러니 나도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앞선 거다. 누가 말을 해도 그 말이 옳은 이치고 옳은 말이면 얼굴을 찌푸리고 인상을 써야 하느냐, 옳은 말 앞에 자기 양심이 꿇어 엎드려야 하느냐? ‘내 말을 하는구나’ 하고 인상을 쓴다면 신앙의 사람이 아니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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