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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한계
로마서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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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탁월한 사도이지만 그 역시 시간과 공간에 갇힌 한 사람입니다. 그도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가 절실한 죄인이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노예제도가 일상인 사회였습니다. 가난과 자연재해와 전쟁 등으로 노예가 발생하였고 여간해서는 그 신분을 벗어날 수 없어 대대손손 굴욕을 짊어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유대의 ‘희년법’은 기절초풍할 정도로 초월적 제도입니다. 아쉽게도 오늘의 교회에서조차 이 혁명적 제도를 현실화하려 하지 않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교 역시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방증같습니다. 한계상황 속의 인간이 슬픕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외면하고 굴욕의 삶을 숙명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비통합니다. 부조리한 사회제도를 극복하기에 시대의 흐름은 너무 더뎠습니다. 이런 시대에 종교의 역할은 운명을 고착화하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체념시키고 다만 내세의 복락으로 최면을 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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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대사도인 바울조차도 당시의 노예제도를 수긍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노예제도의 부당성에 대한 언급은 찾기 힘듭니다. 바울은 오늘 같은 시민의 자유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생각과 지향 역시 역사와 문화의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과 성경 전체의 맥락은 초월에 잇대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노예제도라는 현상을 순응하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노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초월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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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상 제물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교회에서는 우상 제물 문제가 중요한 논쟁거리였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교회마다 몸살을 앓았습니다. 바울은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지만 믿음이 약한 자를 생각하여 조심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고전 8:4~11). 심지어 음식으로 인하여 형제가 실족한다면 자신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본질을 중히 여기되 현상도 살피라는 말로 들립니다. 오늘의 교회에서 우상 제물 문제는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보다 더 교묘한 우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이라는 현상보다 본질에 관심을 가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갇힌 인간은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거나 하찮은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며 당시 종교인의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오늘의 사회와 교회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본질보다 현상에 집착하는 일은 주님의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초월을 구체화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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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14:1 새번역). 교회는 믿음이 든든한 신자만 있지 않습니다. 갓 믿기 시작한 이도 있고, 믿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성숙이 더딘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14:8 새번역).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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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의 기초가 흔들리는 세상살이에서도 변함없는 믿음의 길을 따라 오롯이 사는 주님의 백성에게 반석이신 주님의 안전 보장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한 하나님을 같은 성경을 통하여 믿으면서도 작은 차이로 시비를 따지는 일이 교회에서 사라지기를 빕니다. 본질에 충실하여 초월에 이르는 교회이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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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294 하나님은 외아들을 https://www.youtube.com/watch?v=sc6ftCnwA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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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렘브란트의 <바울>을 바라보는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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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 2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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