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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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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래서 , 그런데
디도서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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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과거가 있습니다. 뒤돌아보면서 절로 미소가 그려지고 그리움이 사무치는 아름다운 과거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후회와 고통과 원망의 아프고 슬픈 과거도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과거를 정확하게 집어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고, 순종하지 아니하고, 미혹을 당하고, 온갖 정욕과 향락에 종노릇 하고, 악의와 시기심을 가지고 살고, 남에게 미움을 받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3:3 새번역).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상식이나 양심보다 자신의 유익이 앞섰습니다. 적당히 거짓말하는 일을 차라리 삶의 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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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주심과 성령으로 새롭게 해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3:4~5 새번역).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언급하였던 구원의 도리를 언급하며 우리의 구원이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으로 성령님께서 주도하셨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3:6). 과거에 우리는 악을 도모하며 자기 욕망에 복무하던 자였지만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하심이 우리를 그 악에서 건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3:7 새번역). ‘전에는’, ‘그러나’, ‘그래서’가 바울이 하고자 하는 문맥을 연결시키며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재촉합니다. 4절의 ‘그러나’는 앞의 내용과 상반되는 내용을 이끌 때 쓰는 접속부사입니다. 과거 우리가 죄 가운데 빠져 서로 미워하며 살았다는 점을 상기하며 반전을 꾀하는 바울의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7절의 ‘그래서’는 앞 내용이 뒤 내용의 원인이나 근거, 또는 조건이 될 때 쓰는 접속 부사입니다. 우리가 상속자가 된 이유는 성령님이 주도하신 은혜로 말미암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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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말씀을 반복하여 읽으며 오늘 우리 민족의 현실을 생각해봅니다. 작은 나라에도 지방색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나 그렇습니다. 다른 지방에 대한 견제와 비호감은 있었지만 상대를 죽이고 싶은 증오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외세에 의해 분단이 되고 이념 대립의 결과로 동족상잔 전쟁 과정을 거치면서 남북의 증오는 엄청나게 증폭하였습니다. ‘때려잡자.’ ‘무찌르자.’ ‘쳐부수자.’ 무시무시한 폭력의 언어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화해와 일치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가 미움과 증오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포성이 그친 지 70년이 되었지만, 한국 주류 교회의 생각은 여전히 섬찟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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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우리가 죄에 복무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에’처럼 ‘서로 미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증오와 복수의 칼날을 벼리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에 대한 배신이며 주님의 사랑에 대한 반역입니다. 교회가 바뀌지 않는데 세상이 변화할 리 만무합니다. 안타깝고 슬프지만 희망은 너무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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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가치를 비웃고 교회의 권위가 추락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믿음과 경건을 추구하며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부여잡고 사는 한 믿음의 지체들에게 주님의 따뜻한 동행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빕니다. 저희를 죄에서 구해주신 은총이 하해와 같은데도 구원 이후를 사는 저희는 구원받기 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희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꾸짖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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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289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https://www.youtube.com/watch?v=nYj2vxmVG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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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7. 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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