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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의 무효화
예레미야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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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도 앞으로 나가는 전인적 행위’입니다(히 11:8). 그래서 믿음에는 무모한 면이 있습니다. 믿음은 보편적 상식에 터하지만 그것을 초월합니다. 믿음은 합리적 이성을 귀중히 여기지만 그것을 추월합니다. 그래서 바랄 수 없는 것을 믿고,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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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보는 이스라엘은 상반된 두 모습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기억하십니다.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젊은 시절에 얼마나 나에게 성실하였는지, 네가 신부 시절에 얼마나 나를 사랑하였는지, 저 광야에서, 씨를 뿌리지 못하는 저 땅에서, 네가 어떻게 나를 따랐는지, 내가 잘 기억하고 있다”(2:2 새번역). 그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메마른 땅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자손, 곧 지금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은 ‘기름진 땅에서 아름다운 것을 먹으면서도’ 하나님의 땅을 더럽혔습니다(2:7). “주 너의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여 주는데도, 네가 주를 버리고 떠났으니, 너 스스로 이런 재앙을 자청한 것이 아니냐?”(2:17 새번역) 그 모습이 오늘 우리와 닮았습니다. 여전히 교회는 흥왕한 데 이 시대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찾지 않고, 학자들은 하나님의 진실을 모릅니다. 권력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언자들은 바알을 칭송합니다(2:8).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땅이 더러워지면 땅의 사용자를 바꾸십니다. 그래서 과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가나안족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땅의 임차인이 임대차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임대인은 임차인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법대로(2:9) 그 백성을 치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심판을 작정하시면 #쇼케드(1:12, 관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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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을 무효화 하려는 이들은 과거 40년 광야 생활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이집트의 세계관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불평등을 꿈꾸는 이들, 자기 행복을 다른 이의 불행 위에 세우려는 이들, 소수의 안락을 위해 다수에게 고통을 요구하는 이들, 정의와 평화의 원칙보다 안락과 번영을 추구하는 이들이야말로 환애굽을 획책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출애굽 무효화가 일어났고, 하나님은 마침내 주변 나라들을 심판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래 놓고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오가는 정치적 행보를 통하여 살길을 구걸하는 그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와 너무 닮았습니다. 희망은 외부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음을 그들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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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즉 구원을 무효화 하는 세력은 오늘 교회 안에도 존재합니다. 이런 이들일수록 교권에 집착합니다. 교회를 자기 욕망의 수단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보다 개인의 영달과 행복을 우선합니다. 규모와 힘을 숭배합니다. 작은 것을 무시하고 약한 자를 천시합니다. 이들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바알의 자식이며 맘몬의 부하입니다. 이런 이들에 의하여 교회는 흔들려 세상의 등대 구실을 못 합니다. 이런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이런 교회 지도자가 아무리 많아도 교회는 무기력합니다. 수만 개의 교회가 저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 땅에 주님의 의로움이 실현되지 않고 있고, 민족 갈등이 치유되지 않는 현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예레미야의 슬픈 낯이 오늘 한국교회를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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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있기를 빕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오늘, 이 땅과 이 땅의 교회를 향하고 있습니다. 황폐한 이 땅에 샘이 다시 솟아나기를 기도합니다. 잘려진 그루터기에 새순이 돋듯 새날의 희망이 이어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 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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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182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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