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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3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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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8장 31절-34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예수님은 신령천국에서 오셨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셨고, 그러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신령천국의 것이다. 그 천국의 말씀을 들려줄 때 그 말씀을 영접하는 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으로 인격이 성품이 만들어지면서 천국의 소원과 목적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천국의 옳은 지식이 들어감으로써 천국의 소원 목적과 함께 사람이 성품이 만들어진다 그 말이다. 하늘의 말씀을 많이 들으면 하늘의 생각을 갖게 되고 하늘의 이해타산 판단을 하게 된다.
만일 예수님께서 땅에서 솟아나셨다면 땅의 것으로 말씀이 된다. 누구든지 잘 아는 것으로 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의 전문가요, 영원 전서부터 천국에서 사셨다. 만일 땅에서 솟아나셨다면 이방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으로 가르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시면 당신이 이방인들에게 넘기어지고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과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살아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누가 넘겨줄까 그게 궁금하다.
예수님은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과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죽임까지 당하고 그 다음에 살아난다고 하는 이 사건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12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당당히 올라간다. 왜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올라가느냐? 이유는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성경말씀대로 성경을 응하게 한다. ‘자, 봐라. 내가 올라간다.’ 어릴 때 이사를 갈 때도 내려가고 올라오더라도 성경을 응하게 하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대로 내려가고 올라가고, 이사 가고, 왔다 가고 하신다.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는 데도 그걸 아시면서도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올라간다. 멋있는 삶이 아니냐?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까지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성경대로 자기 삶을 사는 면으로 들어가는 거냐, 아니면 세상바람이 부는 대로, 세상이 오라는 대로, 물질이 오라는 대로, 돈이 오라는 대로, 되는대로 그렇게 사느냐?
인간 자기를 누가 만들었느냐? 부정모혈로 통해서 누가 만들었느냐? 부모가 자식을 생산해 놓고 누가 주신 줄도 모르고 부모끼리 살기 싫으면 떨어지고 자식도 버리고 하는 인생이냐?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만드실 때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분명히 있는 건데 그걸 알고 자식을 버리느냐?
성경은, 예수 믿는 것은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인간의 본분이다. 사람이 참 사는 본분이다. 학생으로 말하면 인생 교과서다. 그런데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만 알아서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고 그런 거냐? 타 종교는 믿으나 마나다. 그런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치가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전제하고 들어가서 보면 벌벌 떨리는 말씀이다. 자기가 알던 모르던, 예수를 믿던 안 믿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에게 그대로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역사가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왜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느냐? 왜 아무렇게나 생각을 하느냐?
예수님의 33년의 걸음걸이가 성경을 응하게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걸어갔다.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많은 신실한 종들이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선지자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고. 전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 속에는 전부는 자기를 향해 들어가 있다. 모든 사고방식과 이해타산과 평가성이 자기를 향해서 들어있다. 무섭게 생각을 해야 한다. 두렵게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창:에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인간의 코에다 하나님의 입김을 불어넣었다. 처음부터 만드실 때에 ‘인간아, 너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운으로 사는 인간이다.’ 그런데 밥 먹고 코에 바람이 들어가니까 그게 사는 걸로 생각을 하느냐?
누가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었느냐? 처음엔 가룟유다가 넘겨주었다. 넘겨주는 사람이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다. 배반하는 사람이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항상 가까이 있다. 그러니까 가까울수록 조심을 해야 한다. 사람도 가까울수록 규모 있게 살아야 한다. 그게 조심이다. 이방 불신자들은 가까울수록 말버릇이 더럽고 행동도 더럽고 막 나온다.
예수님을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사 장로들에게 넘겨주니 이들이 또 이방인인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준다. 이 의미가 지금도 들어가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목사들이, 박사들이, 종교계 인사들이 예수님을 넘겼다. 왜? 돈에 욕심을 내고 예수 믿는 것, 돈에 욕심을 내고 예수이름으로 ‘세상 축복 축복’ 하는 게 예수님을 팔아먹는 것이다. 거짓 종들이 많이 팔아먹는다. 세상과 바꿔먹는다. 오늘날 그렇게 들어가 있다.
그러니 이들은 예수님을 아는 차원이 예수님만큼 아는 게 아니라 ‘세상 축복 축복’ 하면서 세상으로 바꿨으니 세상으로 들어가 있다. 예수님이 세상만큼 값어치도 없이 뚝 떨어졌다. 천국에서 오신 이 분을 땅의 것과 바꿨다. 이치가 그렇다.
그런데 당신이 모든 고난을 다 겪은 후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한다고 하는 이 사건을 예수님이 다 말씀을 해 주셨다. 이게 다 거룩한 성업인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것이 거룩한 역사요, 하나님의 설계대로 믿어가는 게 거룩한 업이다. 그런데 거룩한 성업을 이루시는 여기에 어느 누가 대적적 부정적으로 이용이 되었나? 어떤 마음을 가진 자들이 대적적 부정적으로 이용이 되었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줬다. 가룟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먹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팔아먹고. 잠:에 금은보화보다 지혜를 얻으라고 했는데 바꿔먹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마지막 시대에 종말을 이루려고 바꿔먹고 있다.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예수 믿는 건 다 바꿔먹은 거다.
예수님은 거룩한 구원의 성업을 이루러 가는데 이 예수님을 잡아 죽였으니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세력이 더 세게 보이느냐?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세권이 더 세게 보인다. 예수님이 눈을 가리워지고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하니까 그들의 세력에 꼼짝없이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성업을 이루는 역사적 세력의 주도권은 누가 가지고 그 일을 하시는 거냐? 예수님이 갖고 그 일을 하고 계신다.
인간아, 네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처분하더라도 어떻게 대하더라도 그게 인간으로 볼 때 네 주도적 세력으로 하는 것 같지? 아니다. 한 삼일만 지나봐라.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예수님의 전무후무한 이 거룩한 성업에 어느 누가 긍정적 자원적으로 수종을 들고 가느냐? 가룟유다는 부정적으로 수종을 들고 갔다. 그런데 누가 전무후무한 그 역사에 긍정적 자원적으로 순종을 하고 가느냐? 이거 참 귀하다.
우리는 이런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정신을 가지게 되니 거룩한 성업에 종사 자체가 하나님의 종으로 역사가 들어가는 거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어느 누가 마찰과 충돌을 일으켰다고 해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멈추거나 하나도 빠진 일이 없이 창세 전에 설계하신대로 그대로 이용 응용을 다 하고 가신다. 부족함이 없다.
누가 어떤 식으로 대적을 하고 팔아먹고 죽이고 말로 문대고 꼬집어 뜯고 헐뜯고 해도 예수님 당신의 성업을 이루는 데는 부족이 없다. 누가 어떻게 해도 있는 대로 다 잡아 쓰신다. ‘인간 대 인간이 붙어보자’가 아니라 인간 보기에는 힘없는 분 같으나 전부는 당신의 성업에 이용을 하신다. 참 멋있는 사람이다. 실력이 없으면 그렇게 못 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어찌 그리 대립이 나오고 충돌이 나오고 마찰이 나오는지? 이건 구원이 아니다. 대립 마찰 출동적인 의미로 들어간다면 구원이 아니다.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도 대립 마찰 충돌이 있어도 한 발 물러서는 게 구원이다. 그게 이기는 거다. 멋있는 싸움이다. 누구든지 인간들이 생각할 때는 달려들어서 공격을 해야 이기는 것으로 알지만 신앙의 싸움은 한 발 물러서서 있는 게 이기는 거다. 자기가 다치지 않고 이기는 게 멋있는 싸움이지 얻어맞고 상처투성이가 돼서 이겼다고 하면 그건 이긴 게 아니다. 하나도 상처를 안 받고 이기는 게 멋있는 싸움이다.
그 사건이 지나고 제자들이 사도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성경을 응하게 하러 가신다고 하는 주님의 그 심정을 알까? 올라가는 그 당장은 모른다. 그러면 오늘날 앞뒤의 그 역사를 다 아는 우리가 어떤 고난을 만나도 이룰구원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따라가는 구원의 발걸음으로 보혜사 성령의 주님과 같이 동행하는 발걸음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느냐? 주님의 그 역사를 앞뒤로 다 아는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룰구원으로 가는 이 걸음걸이가 주님과 같이 동행하는 발걸음이라는 것을 알겠느냐?
제자들은 당시에 주님과 같이 가면서 역사가 안 이뤄졌으니 몰랐다. 그런데 그 후엔 주님의 심정을 알았는데, 오늘날 그 모든 사건을 앞뒤로 다 아는 우리 입장에서 지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 붙잡고 보혜사 성령의 인도로 즉, 주님의 인도로 가는 길임을 알겠느냐? 말하자면 어릴 때는 부모의 심정을 몰랐다. 그 아이가 자라서 부모가 되니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 부모님이 이런 마음을 가졌겠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느냐? 사람은 느낀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주님의 그 심정이 느껴져야 한다. 신앙이 살았다면 주님의 그 심정을 느끼는 거다.
지금 자기의 신앙이 이룰구원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걸음걸이로 가면 성령 주님이 동행하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게 믿어지느냐? 하나의 종교생활과, 성경에서 인격적으로 느끼는 것과는 사랑의 깊이가 다른 것이다.
우리의 이룰구원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냐, 성경을 파괴하는 것이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거냐? 우리의 신앙의 발걸음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데로 들어가야지 오늘날 교회에서 ‘세상 축복받고’ 하는 게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냐? 하기야 응하게 하는 거긴 한데 그건 세상 불탈 쪽으로 응하게 하는 거다. 세상에 속한 믿음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 눈에 보이는 것만 안다. 그러니까 자기 신앙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에만 이해타산이 간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속한 믿음이다.
구원이 무엇인지? 무엇이 구원인지? 고난과 부활 속에 어떤 보물이 들어있는지? 우리는 예수님의 올라가는 발걸음 속에서 그걸 발견해야 한다. 예수님의 죽고 그 다음에 삼일 만에 살아나고 하는 여기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이 들어있다.
‘사람이 부귀를 누리다가 죽는다’와 ‘고난 후에 부활이 있다’ 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 돈 가지고 잘 살다가 죽는 거? 아니면 부활 쪽이냐? 부활 쪽이냐? 그렇다면 부활을 맞기 전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 거냐? 부활이 되기 전에 고난 받고 죽는 게 전제가 되는 것이다.
가령 예수님께서 당신이 고난을 받을 때 걷어붙이고 치고받고 싸웠다면 예수님이 부활이 되겠느냐? 예수님의 고난은 사람이 볼 때는 진 것 같으나 이겼다. 그래야 부활이 있다. 그리고 내가 현재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것이 진리 때문이냐, 아니면 내가 어리석어서 조롱을 당하는 것이냐? 잘 분별해야 한다. 학생들도 공부를 잘 해서 왕따를 당하는 건지, 공부를 못해서 왕따를 당하는 건지 그 이유가 있는 거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이뤄가는 구원도 성경을 응하게 하는 삶이다. 이룰구원으로 예수 믿고 이치를 깨닫고 만들어지는 게 성경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인간으로 만든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사는 것이다. 이걸 벗어나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삶과 전혀 관계가 없는 옛사람이 주격이 된 신앙이 있다. 이건 육에 속하고, 세상에 속하고, 세상정신으로 예수 믿는 것이다. 세상정신으로 예수 믿으면서 자기 성격 성질대로 막 사는 거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교회에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말고 싶으면 말고, 진리는 좋은데 듣기 싫은 소리는 걸리고. 이건 벌써 넘어진 것이다. 다른 사람은 괜찮은데 왜 자기만 걸리느냐? 말씀에 대립이 되는 성질에 걸려 있어서 넘어진 거다. 말씀의 이치가 와서 때리면 회개를 해야지. 바로 잡아야지. 그게 아닌 하나님의 옳음을 버리고 인간의 감정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버리느냐? 그게 되겠느냐?
목사들끼리 싸우고 ‘진리가 뭐 이래?’ 하고 안 나온다면? 목사님들 개개인마다 성격 성질이 있고 만들어 가는 중이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싸우고 ‘진리가 뭐 이래?’ 한다면 그게 되겠느냐? 자기들끼리 싸우고 안 나온다면 누가 답답한 거냐? 가령 형제끼리 싸우고 ‘나 이 집 싫다’ 하고 집을 나간다면 어디서 밥을 먹겠느냐? 형제들끼리 싸우고 부모가 해 주는 밥을 안 먹고 집을 나가면 누가 고생이냐? 미련하고 이치도 없고 소갈머리도 없고 쓸개도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종들 속에 허다하다. 하나님의 종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차원은 벗어나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만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으면 하등의 상관이 없다. 아무리 깎아내리고 쑥덕거리고 밟고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 오해하고 그러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형벌이 오는 거다.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소문이 돌아도 자기 입으로부터 자기 행동으로부터 안 그랬으면 가만히 있어라. 원수는 하나님께서 처치해 버린다. 지푸라기에 불붙는 것처럼 하면 시험에 든다. 아직 사람이 덜 됐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노선을 걷는 우리는 그런 차원은 올라서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타산을 따지는 차원으로는 예수 바로 못 믿는다. 바로 믿으려면 사람 중에 사람이 돼야 한다. 종교인으로는 안 된다. 종교인으로는 예수 바로 못 믿는다.
세상주의 사역주의 신비주의 구복주의 이런 신앙자들은 이룰구원과 영능의 실력, 믿음실력과 상관이 없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게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하시는데 자기는 자꾸 땅 쪽으로 소원을 갖고 그걸 이뤄달라고 하니 이건 예수님의 의사와 관계없이 믿는 거다. 예수 믿는 효력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영적 진리이치의 깨달음은 관심이 없고 물질 하나님의 축복성을 자꾸 달라고 한다. 그러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물질축복이 없느냐? 이치에 맞지 않는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이신 예수님이 고난을 받는다면 역시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도 고난을 받게 된다. 강한 칼이 되려면 불속에 안 들어가면 안 된다. 불속에 들어가서 달궈져서 쇠망치로 많이 얻어맞아야 강한 쇠가 된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은즉, 당신이 잘못해서 고난을 받은 게 아니라 진리 때문에 구원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역시 믿는 성도도 진리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된다면 이건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 결과는 승리로 들어간다. 부활이란 영원한 승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부활이 되면 누가 못 죽인다. 그러니 영원한 승리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겠고’ ‘죽고자 하는 자는 영원히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된다’ 등등의 말씀이 무엇이 죽고 사는 건지 모르고 믿는다면 부활의 신앙은 아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게 무슨 뜻이냐? 신체가 안 죽는다는 말이냐? 육신이 살아서 예수를 믿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대로, 살아있는 말씀의 이치대로 믿어나가면 자기 속에 죽지 않을 사람으로 사는 거다. 이게 믿음의 사람이요, 신앙의 사람이요, 성경에서 말하는 새사람이다. 이게 영원히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불에 타지 않는 사람이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뭐가 죽고자 하는 거냐? 옛사람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현재적 자기가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는 예수 바로 믿다가 죽어도 좋다’ 하는 것. ‘나는 예수 믿다가 거지가 돼도 좋다. 길바닥에서 죽어도 좋다. 그래도 나는 예수 믿다가 죽는다’ 하는 것.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어떻게 살고자 하는 자? 육신이 잘 먹고 잘 살고 예수 믿고 세상에서 부자로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뭐가 죽느냐? ‘육신이 죽는다’가 아니라, 물론 육신은 언제 죽어도 죽는 거지만 성장되고 이룰구원으로 되는 그 면이 다 죽는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세상부자에 꿈을 꾸는 자는 다 죽었다. 말씀의 이치가 그렇다. 실지로 이런 자는 믿음이 산 자는 없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옳은 진리를 끄집어 내리고 깔고 뭉개고 이단이라고 한다. 그래, 결과를 볼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능욕했느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들이 이방인들과 합세해서. 이걸 그대로 지금으로 가지고 와서 보면 세상정신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들의 정신과 합세가 됐다. 자기 속에 이 성분이 합세가 되면 나타나 보이는 면도 안 믿는 사람과 합세가 된다. 반드시 그렇게 되게 돼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들이 이방인들과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였듯이 언제든지 혼합된 신앙사상이 예수님을 능욕하고 죽이게 돼 있다. 혼합된 사상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사상이다. 진리신앙을 죽이는 사상이다. 이치는 똑같다. 자기 속에 혼합된 신앙사상을 가지고, 세상적으로 믿어나가는 게 혼합된 것이다. 그 사람은 이 진리를 아무리 받아도 그 사람 속에는 진리의 신앙이 살아나지를 못한다.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구원을 종교 외식자에게 넘겨주었듯이 이들은 예수구원을 이방인들에게 끌고 가는 신앙사상이다. 교회가 이렇게 되면 온 교회가 세상화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말씀이 감춰져 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다가올 사건은 하나도 깨닫지 못한다. 본문의 말씀이 그런 뜻이다. 세상 속화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세상과 바꿔먹는 신앙은 다가올 사건이 그들의 눈에 감춰져 있다. 그래서 모른다.
밟던 찍던 끄집어 내리던 그걸 통과해야 부활의 신앙이 된다. 부활의 신앙이란 승리라는 게 들어가 있는 거다. 거기서 멈추고 있다면 통과가 안 된다. 넘어진 거다. 진 거다. 그러니 신앙의 승리자가 못 된다.
거짓 신앙이 성경을, 예수를 세상과 바꿔먹는다. 오늘날 거짓된 목사들이 성경은 천국의 말씀인데 이 성경을 세상 소원 목적에 붙여버린다. 그러면 바꿔진다. 이렇게 되면 땅의 것을 위해서 예수를 믿게 된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 것인데 그게 바꿔지니까 거짓된 목사들이 예수 믿어 세상 부자 되는 쪽으로 자꾸 내려간다. 그건 바꿔먹은 거다. 그러면 그런 신앙자들에게는 앞으로 사건이 오는데 그게 감춰져 있다. 그래서 모른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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