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예언자적 완료
예레미야 6:1~15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의지는 확고합니다. “딸 시온은 아름답고 곱게 자랐으나, 이제 내가 멸망시키겠다”(6:2 새번역). 하나님은 유다를 아름답고 곱게 자란 딸로 비유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딸을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하십니다. 여기에서 ‘멸망시키겠다’의 히브리어 동사 ‘다미티(יתי )는 완료형입니다. 이를 예언자적 완료라고 하는데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현재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표현하는 히브리어의 방식입니다. 그만큼 분노가 크고 실제적이며 결코 돌이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분명히 표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이유를 본문에서 적어도 네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루살렘에 만연한 폭력입니다.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아야 할 도성이다. 그 도성 안에서는 탄압이 자행되고 있다”(6:6 새번역).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더 이상 인애와 공평의 도시가 아닙니다. 힘이 숭배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상대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돈에 눈이 멀었습니다.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다”(6:13 새번역)는 점입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처럼 죄인 된 인간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너무 쉽게 맹목적 존재가 됩니다. 나쁜 꾀로 남을 속여 잇속을 챙기기를 예사로 하고 이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것이야말로 능력이라고 자랑합니다. 도덕도 없고 양심도 없습니다. 셋째는 종교의 타락입니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6:13b~14 새번역).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막힙니다. 세속의 욕망에 젖어 사는 백성을 야단쳐야 할 종교가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짬짜미가 되었습니다. 책망이 불가능하니 치료도 할 수 없고 희망을 이을 수 없습니다. 딱하게도 종교와 세속의 경계선은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네 번째는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천만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6:15 새번역). 그들은 수치를 알지 못합니다(3:3). 이 정도면 막장입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멸망을 현재적 적용으로 통보받고 있는 유다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인들 역시 돈 버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맘몬이 주는 정보를 하나님이 주는 정보로 왜곡합니다. 유혹하는 미끼를 복음으로 착각합니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가난한 자의 아픔을 배가시킵니다. 악한 꾀로 얻은 불로소득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거짓말을 합니다. 교회는 세속사회의 병폐를 뻔히 알면서도 애써 못 본 체하며 한 통속이 되어 스스로 무능을 드러냅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부패한 종교는 무너지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백해무익합니다.
이런 중에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귀띔하십니다. “그러니 예레미야야,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포도 따는 사람이 포도덩굴을 들추어보는 것처럼, 네가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6:9 새번역).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줄 사람들은 귀가 막혔습니다(10). 귀가 막힌 이들을 상대로 외치는 현실이 예언자의 실존입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겹겹이 에워싸인 적들 속에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듯합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내는 이 시대 예언자들에게 힘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만이 제 편이십니다.
찬송 : 274 나 행한 것 죄뿐이니 https://www.youtube.com/watch?v=BZoElf1QG9s
2023. 7. 18 화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