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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고문
예레미야 7:30~8:3
저는 요즘 예레미야서 읽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읽기를 포기하고 묵상을 멈추기도 하였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언제나 메아리쳐 돌아올 뿐 누구 하나 귀 기울여 듣는 이가 없었습니다.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데 그래도 반복해야 하는 예언자의 처지가 딱합니다. 효과가 없으니 목청껏 외치게 할 필요도 없을텐데 여전히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시는 하나님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예레미야서를 읽고 그 시대를 슬퍼하며 오늘 이 시대를 지켜보아야 하는 저도 기가 막힙니다. 긍정과 희망과 평안을 말하고 싶은데 나오는 말이 언제나 어둡고 슬프고 막막합니다. 모름지기 이런 저의 거칠고 얕은 글을 읽는 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아멘’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가장 먼저 저의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병상에 누워계신 구순이 넘은 노인이 아침마다 빠지지 않고 ‘아멘’으로 화답하십니다. 그냥 아들이 전해주는 말씀이어서가 아니라 백 년에 가까운 인생 풍파를 겪은 신앙인의 간절한 기도가 묻어난 ‘아멘’이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받습니다. 게다가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이 글을 대하신 몇 분의 벗이 이를 다시 주변 이웃들과 나누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슬픔과 절망의 메시지가 생각보다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희망고문’입니다. 안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될 것 같다는 희망을 주어서 독자에게 고통을 확대 재생산하는 주는 것이 예언자의 주특기인 모양입니다. 여기에 #슬픔의연대성 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의 마음에 접속한 이들과 더불어 비통해 하십니다.
세상의 끝은 절망의 소리가 들끓는 때가 아니라 희망과 기쁨의 소리가 그치는 때입니다. “그때에는 내가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에서, 흥겨워하는 소리와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신랑 신부의 목소리를 사라지게 하겠다”(7:30 새번역). 이 땅에 문제가 없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고통과 절망의 한숨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희망과 기쁨에 대한 기대도 늘 있었습니다. 그 희망과 기대가 억눌린 세상을 버텨내는 버팀목이 되었고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끝날에는 그 기대조차도 물거품이 되는 때입니다. 머잖아 죽음보다 못한 삶이 현실이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유다 왕들의 뼈와, 유다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예언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들의 무덤에서 꺼내다가, 그들이 좋아하고 노예처럼 섬기고 뒤쫓아 다니고, 뜻을 물어보면서 찾아 다니고 숭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천체 앞에 뿌릴 때’(8:1~2)가 마침내 올 것입니다. 유다 민족의 자존감은 무너지고 유대인의 얼굴은 #똥칠 을 당할 것입니다. 유구한 유다의 전통과 역사는 허물어져 수치의 대명사가 될 것입니다.
이 일이 어찌 유다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인간의 존엄성을 외면하고, 생명과 역사의 가치를 부정하고, 공정과 상식을 왜곡하고, 인류의 건강한 지향성을 거부하는 사회, 곧 하나님의 주되심을 부정하고 미신과 무당에 현혹되어 자기 욕망에만 복무하는 사회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 누구든지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레미야를 읽는 오늘의 예언자가 전해야 할 메시지 아닐까요? 이 일이 희망고문이었으면 차라리 낫겠는데 하나님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가기를 원하시는 듯합니다. ‘절망고문’으로 말입니다. 불치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수술이 어렵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야지 '수술해도 불가능하다'고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희망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참 어렵습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된다고 말할 때가 차라리 신사적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이상의 절망고문을 선포합니다. 이 희망 없음의 시대를 어찌 살아야 하는지요?
찬송 : 322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https://www.youtube.com/watch?v=6BrSYC27tE0
2023. 7. 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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