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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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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는 그냥 짓는 게 아니라 어떤 의미를 넣어서 짓는다. 성경에도 보면 어떤 의미를 넣어서 사람의 이름을 지은 게 많다. 그런데 교회 이름을 장난처럼 지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이름을 짓는 사람의 사고방식에서 그런 이름을 짓는 것이라서 교회 이름을 보면 그 교회 목사님의 사상이 나오는 거다.
성경은 비유와 비사이니 눈에 보이는 것을 가져와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님의 감화로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영적인 뜻을 넣어서 지었다는 거다. 따라서 성경을 깨달을 때도 성령의 감화라야 깨달을 수 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영적인 뜻이 아니다.
예수를 안 믿는 세계에서 점쟁이나 무당이 사람의 장래를 말하려면 하다못해 귀신에 씌어서 말을 한다. 귀신의 감화를 받아서 한다. 하물며 우리가 비유와 비사로 된 성경을 깨달으려면, 성경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면 성령님의 감화를 입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은 나를 당신처럼 만드는 거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드는 거다. 주님이 성육신 되어 오신 것은 우리로 주님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닮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 주려는 거다. 이건 인격적 관계성적으로 보는 거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 승천은 ‘너도 나중에 나처럼 올라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했는데, ‘우리가 우리에게’란 인인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있고 예수 믿는 사람 간의 인인관계가 있는데, 이 ‘우리가 우리에게’를 더 좁혀서 보면 ‘내가 나에게’가 된다.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죄지은 것을 사하여 준 것 같이 내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가 된다.
우리가 죄지은 것을 사해줄 때 자기가 자기에게 지은 죄를 자기가 용서하는 게 쉬우냐, 남이 나에게 죄지은 것을 내가 용서해 주는 게 쉬우냐? 자기가 자기에게 죄를 지은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임에도 자기가 이 죄를 잘 사해준다. 그러면서 남이 자기에게 작은 죄만 지어도 ‘죽일 놈 살릴 놈’ 한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인인관계에서 원수 맺지 말아라. 상대가 자꾸 대적적으로 나오면 ‘몰라서 저러는구나. 성격 성질을 못 고쳐서 저렇구나’라고 해야지 원수를 맺는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자기를 심판하신다면 자기는 하루도 못 산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기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는 것은 인인관계에서의 죄는 임시성에 속하는 건데 이걸 쉽게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도 ‘너의 죄도 사해주지 않겠다’ 이 말이다. 그래서 진리신앙의 노선에서 이룰구원으로 나가는 우리는 이방 불신자들처럼 사람끼리 원수를 맺으면 안 된다. 우리는 상대가 나에게 원수 짓을 하면 그를 위해 기도하고, 할 수만 있으면 깨닫게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막혀있는 것을 풀어줘라. 이게 얼마나 고단수냐? 예수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룰구원을 깨닫게 하려고 마귀 짓을 하는 사람도 보여주고, 예수를 파는 사람도 보여주고, 진리를 팔아먹는 사람도 보여주고, 예수이름을 이용해서 먹고사는 사람도 보여주는 건데 이런 사람을 지옥에 갈 자라고 하면서 다 끊어버리면 자기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 입어야 할 이룰구원이 없다. 죄를 지은 사람을 향해 함부로 지옥에 간다고 말을 하면 자기도 지옥에 가게 된다는 말이 된다. 왜냐? 자기는 하나님처럼 판단자가 되어서 성경에 있지도 않은 말을 함부로 하기 때문이요, 자기도 100%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 롬: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는데, 이 말이 은혜를 많이 받으려면 죄를 많이 지으라는 거냐? 말씀을 통해 죄를 많이 깨닫고 바로 고치면 그만큼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거다. 이 말씀을 언행심사로 죄를 많이 짓고 적게 짓고 하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모든 언행심사나 모든 사고방식이 죄다. 모든 부귀 영광성이나 존귀성, 소원과 목적과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성이 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성품성이 들어있다. 믿는 사람이 이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과를 먹는 이치를 많이 발견할수록 은혜가 많은 거다. 이걸 많이 깨달을수록 이 사람은 많은 은혜가 있는 거다.
오늘날 기독자들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언행이 좋고 나쁜 것을 어느 정도 알지만 이런 것은 전부가 생명과를 먹고 나온 게 아니라 선악과를 먹고 나온 것이라서 하나님 앞에 죄인데 이것을 모른다. 믿는 우리가 질적인 면에서 이걸 깨달아야 믿음이 성장하는데 오늘날 많은 목사님이 선악과를 따먹은 기준으로 교훈을 하니 교인들이 질적인 면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의 도덕성과, 이방 불신자들의 도덕성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도덕성이 모두 같으냐? 우리는 사람들의 정신이나 생각의 질을 구별하고 분별해야 한다. 성경은 믿는 사람에게 육의 생각이 있고 영의 생각이 있다고 하는데 이방 불신자들은 영의 생각은 전혀 없고 전부가 육의 생각이다. 바리새 종교지도자들도 육의 생각이다. 주님은 매사가 영의 생각이다. 즉 당신의 언행심사 전부는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 우리로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을 입게 하려는 목적으로 움직인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 교인들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성경구절을 들고 말을 해도 전부가 육의 생각에서 나온 거다. 육의 생각으로 성경구절을 말하는 것은 다 외식이다. 오늘날 많은 목사님도 껍데기 운동, 종교적 사역운동이다. 일반 도덕적인 개념으로 선이니 사랑이니 말을 한다. 이것은 다 육의 생각이다.
우리는 하루를 믿어도 똑바로 믿어야 한다. 자기 인생의 나이가 얼마나 남은 것 같으냐? 과거적으로 잘못 살아온 게 인생의 절반이 훨씬 넘는다면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해 피를 토할 정도로 가슴을 쳐야 하는데 먹고 마시고 사는 게 어려움이 없으니 덤덤하게 산다. 믿는 사람이 이방 불신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물질적 소원 목적으로 살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적인 삶이 아니다.
◆ 예수님 당시에 유대 종교인들이 예수님에게 많은 죄를 지었는데, 이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고 옳고 그름이 판단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구원’을 죽였다. 성경을 가지고 진리이치를 죽였다. 이건 성령 훼방 죄다. 성령 훼방 죄는 사함 받지 못한다는 것은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라 학생이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학적부에서 지워버리지 않듯이 천국에 갈 사람이 지옥에 가지는 않지만 그 사건 그 상황에서 입어질 구원의 기회를 놓쳤으니 흘러간 시간과 함께 그 사건과 환경을 통해 입을 구원도 영원히 없다는 말이다.
마: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했는데,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성령님께서 자기 속에서 진리이치로 밝혀서 임시성과 영원히 가는 것, 사망과 생명을 분명히 명확하게 알게 해줬고, 자기 양심도 이것을 증거 하는데도 이걸 무시하고 임시성과 사망적인 것을 붙잡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건데, 이 일이 한 번이면 한 번, 두 번이면 두 번 그 죄는 영원히 사함이 없다는 거다.
하나님의 신이 자기 속에서 역사를 하셨는데 자기 마음에서 이 감화성을 죽여버리면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듯이 이 역사로 인해 하나님의 성품을 입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없는 것이니 이 죄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이 없는 거다. 이게 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는 거다.
◆ 막: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는데, 뭐가 ‘무엇이든지’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게 당시의 로마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신 거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향해 말씀하신 거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거냐? 제자들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떤 생각으로 이 말씀을 하신 거냐?
학교에서 선생님이 ‘누가 내 심부름을 할래?’라고 하면 학생들이 안 가려고 하느냐, 서로 가려고 ‘저요. 저요’ 하느냐? 서로 ‘저요. 저요’ 한다. 그러면 억수 비가 오는데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누가 심부름 좀 갖다 올래?’ 하면 다 안 가겠다고 하느냐, 그중에 용감한 학생은 갖다 오겠다고 하느냐? 후자다. 힘들고 어려운 심부름을 할수록 실력이 붙는다.
성경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목사가 구할 게 뭐냐? 뭐가 ‘무엇이든지’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거다. 그런데 대부분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로 물질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인간을 만들기 전에 물질을 먼저 만들어 놨다. 엄마가 아기를 배면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먼저 어머니의 젖을 만들어 놓고, 아기가 나올 때 골반이 열릴 수 있는 신체로 만들어 놨다. 그래서 태어난 아기는 열심히 젖을 먹고 건강하게 자라기만 하면 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말씀하신 게 인간 자기에게 없는 것을 구하라는 거냐, 있는 것을 구하라는 거냐? 자기가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 것을 구하라는 거냐,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구하라는 거냐? 하나님의 것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구하라는 거다. 자기 것으로 될 하나님의 것을 구하라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했다. 이방인들은 세상 것을 구한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구하지 못하는 게 뭐냐? 하나님의 성품이요 천국이다. 우리는 이것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거짓 목사, 거짓 종, 사기꾼, 강도들이 보통 많은 게 아니다.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라고 하는 것은 다 여기에 속한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고, 그대로 되었다. 성전 안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교만이 산 같은 제사장들을 쫓아내 버렸다. 이게 진리의 역사다. 주님의 언행심사는 전부가 창조로 되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라서 그대로 들어간다.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그대로 들어간다.
그러면 예수이름으로만 구하면 무엇이든지 다 그대로 되는 거냐?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했으니 ‘무엇이든지’하는 속에는 세상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것만을 구하라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하나님의 것중에 무엇이 없는 건지,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이것을 구하라는 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에게 있는 무엇을 주고 싶어 하시는지를 알고 이것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든지, 사랑을 구하든지, 지식을 구하든지 하나를 구해서 이것이 이뤄지면 다른 것은 줄줄 따라오게 된다.
우리가 건강을 구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일에 수종 들기 위해 건강을 구하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이루리라’고 하는 말씀에는 육신의 건강도 포함된다. ‘내가 살아생전에 이룰구원으로 바로 살겠습니다. 구원의 사람으로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한 후에 그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무엇을 고쳐야 한다는 것을 모르실까?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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