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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43-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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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8장 43절-19장 10절.
18장 43절: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19장 1절-10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눈 먼 소경이 예수님을 보게 되니 영광이다. 일반사회에서도 높은 사람이 뭘 시키든지 참석하라고 하면 낮은 사람의 입장에서 ‘아, 영광입니다’ 한다. 눈 먼 소경이 예수님을 보게 되니 영광이다. 예수님을 못 보면 영광이 아니다. 눈을 떠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거다.
보지 못하는 소경은 영광을 돌릴 수가 없다. 아무 것도 못 받은 사람을 보고 ‘당신 나에게 감사하시오’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나 받은 사람은 감사하지 말라고 해도 ‘감사합니다’ 한다. 받은 게 있어야 감사다. 받은 게 없는데 감사는 거짓말이다. 영원한 것을 받으면 영원히 감사다.
눈이 감겨져 있는 소경을 보고 ‘당신은 눈이 감겨져 있으니 영광입니다’ 하는 자가 있느냐? 이건 제 정신이 아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를 향해 ‘나는 앞을 못 보니 영광스럽다’ 하는 자가 있느냐?
주님 닮은 자기의 참 실상을 보지 못하는데 무엇을 보고 영광이라고 하느냐? 썩고 불타질 것을 다 가지면 영광이 될까? 인간 자신의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으로 모른다면 무엇이 영광이냐? 다 소경에 불과하다.
눈을 떠서 보게 되니 얼마나 밝고 좋으냐? 우주와 만물의 크기와 모양과 형태와 색상과 멀고 가까운 것, 높고 낮은 것, 밤과 낮과 사계절이 바뀌는 징조 등 모든 생태계와 존재를 보게 되니 얼마나 기쁘고 좋은가?
남이 소경을 볼 때 답답하고 불쌍하고 처절하고, 손을 잡고 이끌어야 하고, 본인 스스로는 그 답답함을 말로 다 표현을 못한다. 세상의 것, 땅의 것만 생각하고 소원 목적해서 살던 사람이 영의 눈이 뜨여서 하늘에 속한 것을 알게 되니 얼마나 기쁠까?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니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요,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바꿔지니 그것이 하나님을 닮은 영광이요, 그가 소경되었던 것을 아는 백성들이 그 사람을 다 쳐다보며 하나님을 찬양을 한다. 사람 중의 사람이 되면 사람이 보고 ‘참 영광스럽다. 예수님을 믿더니 사람이 저렇게 달라졌구나’ 하고 놀란다. 예수를 믿는다면 그렇게 돼야 한다. 그러니까 모든 일반적인 성격과 성질도 바꿔지고 지혜로워지고 해야 한다.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알고 따라가는 것이지 모르고는 못 따라간다. 위를 보게 해 주시니 예수님을 보게 되고, 예수님을 보게 되니 예수님을 알게 되어서 따라가게 된다. 소경이 눈을 떠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니 모든 백성이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을 한다.
현재 예수 믿는 자기가 예수님으로 많이 닮아지면 속성이 하나님처럼 되는 건데, 그렇게 되면 인간이 추할까, 영광스러울까? 영광스럽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도 추한 사람이 있느냐?
예수를 믿어갈수록 사람이 존귀 영광스러워져야 한다. 그게 예수 믿는 거다. 예수님을 따르니 그렇게 된다. 따르는 게 믿는 거요, 믿으니 따라진다. 그러면 예수님이 감염이 된다. 옮아져 온다. 영의 눈을 뜬 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인격화 실상화 자체화 되는구나. 사람이 말씀의 원로뭉치가 되는구나.
시대도 다르고 사람도 다르다 할지라도 어느 사람이건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면 사람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예수님이 활동이 나오는 거다. 이런 사람은 찬양을 하기 위한 찬양이 아니고 찬양을 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 찬송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증거가 없으면 힘이 없다.
눈 뜨임을 받고 제자들과 같이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면 땅에서만 그런 거냐, 하늘에서도 그런 거냐? 땅에서만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그런다. 소경 되었던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을 하니 또 눈 뜨인 사람을 보고 모든 백성이 찬양을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자기가 영의 눈이 뜨이면 모든 교인들이 좋아하고 천군천사들이 다 좋아한다.
간증은 부자 되고 병 낫고 이런 게 아니라 교훈의 옳음, 주님의 옳음을 증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안에는 각오와 결심이 들어있는 거다.
찬양은 사람에게 직접 관계된 역사에서 나오는 게 찬양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 걸 봤을 때 찬양이나 저주를 하고 싶은 건지? 백성들이 찬양하는 내용과, 자기가 찬양하는 내용이 같은가? 바리새교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소경이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르는 걸 보고 찬양을 했을까, 저주를 하고 심통을 부렸을까? 자기 교인이 더 나은 교회로 간다고 하면 찬양이 나오느냐, 심통이 나오느냐? 부모는 자식이 더 나은 학교로 들어가면 기쁜데 친구가 그걸 보고 심통을 부리면 어떻게 되는 거냐?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들은 종교적 외식으로 유혹하고 미혹하고 위협을 하고 거짓말을 시키고 주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니 이건 정말로 흉악한 마귀의 자식들이 아닌가? 우리가 땅의 것 세상 것을 돋보고 외모 모양을 보고 따라간다면 소경이 된다. 위엣 것을 소원하며 진리를 따르면 하나님의 역사가 그에게 임하게 된다.
집에서 아무리 바빠도 성경 한 장이라도 읽고 싶어 하는 의욕성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첫째는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자꾸 읽으면 그 마음이 하나님 쪽으로 향해져 가게 된다. 성경을 읽고 성경과 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기울이면 존영스러워진다. 안 하면 그만큼 자기는 못 올라간다.
19장 1절-10절: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가시게 되었는데 여리고 성 안에 삭개오가 살고 있었다. 이 삭개오는 키가 작았던 모양이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였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청결하다. 의롭다. 향기롭다’는 뜻이고, 난쟁이 못지않게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 계곡 끝에 있는 성읍이다. 구약시대에 기생라합의 집이 있었고,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이 왔던 곳이다. 여호수아가 저주한 이 여리고를 히엘이 건설하다가 저주를 받고 죽은 곳이다. 여리고 길에서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뜬 곳이기도 하다. 구약에 보면 어느 성읍을 사람이 건설하면 건설한 그 사람의 이름을 따기도 한다.
그리고 여리고는 침엽수과에 속하는 발삼나무에서 나는 액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 하는데, 아마도 삭개오가 세리장을 하면서 그 면의 업에 종사하지 않았나 한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번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부정으로 돈을 많이 번 것으로 알고 죄인취급을 한 것 같다.
마침 예수님께서 이 고을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을 대하는 것을 정신면으로 보면 삭개오는 신앙심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동안 예수님의 소문을 많이 들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 마침 예수님께서 여리고 고을로 들어오신다는 소문에 신앙심이 있었던 삭개오가 마음이 설렜을 것이다. 그래서 삭개오가 길로 나갔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앞뒤로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성벽은 높아서 오를 수가 없고, 키 큰 사람을 보고 업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마침 길옆에 뽕나무 하나가 서 있었다. ‘옳다, 저 나무로 올라가자’ 하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열심을 내어서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다는데 예수님이 우리 고을로 오신다고 하니 기회는 이때뿐이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나? 예수 만나지 못하는 세리장이 뭐가 필요하냐? 부자 따지고, 장 따지고, 자존심 따지고, 학력 따지다가 예수를 못 만나고 죽는다면 그 인간이 무슨 존재가치가 있겠느냐? 사람들이 보건 말건, 웃건 말건, 올라가다가 떨어져서 죽건 말건 일단 목숨을 걸고 뽕나무 위로 올라가자.’ 이게 삭개오의 심정이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비상수단이다.
‘기회는 지금이다’ 하는 삭개오의 이 마음을 주님은 아시고 삭개오를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심 정신 소원 목적 마음이 어느 정도 강한지 주님은 알고 역사하신다. 삭개오의 그 마음을, 그 장면을, 그런 기회를 예수님은 아신다. 삭개오가 어떻게 정신과 마음을 쓰고 있다는 걸 아신다.
예수님께서 뽕나무 밑까지 오셔서 발걸음을 멈추고 위를 쳐다보신다. 위를 쳐다보신다 함은 ‘건방지다. 빨리 내려와라’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성도를 그렇게 귀하게 보신다는 것이다.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그 성도를 그렇게 귀하게 여기신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되겠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발걸음이지만 그런 성도에게 머물고 가실 정도로 예수님은 기쁨의 위로를 받고 가신다. 부모가 자식들의 집에 가면 자식들이 부모를 향해서 ‘어떻게 하면 마음 편히 지내다 가시게 해 드릴까’ 하느냐, 아니면 ‘귀찮은데 왜 왔나’ 하느냐?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와서 위로를 받고 가신다. 마음이 편하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얼마나 기쁘고 기다렸던 일이냐?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간다. 이 장면을 본 어떤 사람들은 못마땅해서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린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듣는 것이 죄인이냐,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율법은 달달 외우면서 외식운동을 하는 것이 죄인이냐? 어느 것이 생명이고 영생이며, 어느 것이 사망이고 심판이더냐? 그들은 삭개오를 보고 죄인이라고 했고, 그 집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도 죄인취급을 한다.
죄가 뭐냐? ‘생명과를 먹고 통치하고 다스리라’고 하는 생명과는 안 먹고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고 하는 선악과를 먹는 것이 죄다. 그러니까 생명과를 안 먹은 것이 더 후회가 되느냐, 선악과 먹은 것이 더 후회가 되느냐? 생명과를 안 먹은 것이다. 그러면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으면 어떻게 되느냐? 생명과를 못 먹고, 못 얻어먹고, 못 듣고, 못 알아듣고, 못 깨달은 게 평생을 두고 후회다. 생활 속에서 생명과를 안 먹은 정신으로 자기의 언행심사가 파장돼 들어가는 이것이 생명이겠느냐? 사는 것이겠느냐?
예수 안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식구가 진리 길을 가는 것을 극히 반대하거나 우상을 섬기고 있다면 이건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그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그들을 버렸느냐? 예수님을 사귀고 예수 같은 친구를 사귀면 더 축복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약속이 축복으로 들어가 있다. 당신의 이름을 걸고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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