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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1:1~17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다 하나님의 뜻에 늘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백성의 태도는 천양지차를 보입니다. <예레미야>에서 예레미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고난받는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비탄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함께 가슴앓이를 하며 고난을 몸으로 살아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고난 가운데서 지켜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너를, 튼튼하게 방비된 성읍과 쇠기둥과 놋성벽으로 만들어서, 이 나라의 모든 사람, 곧 유다의 왕들과 관리들에게 맞서고, 제사장들에게 맞서고, 이 땅의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1:18) 새번역). 이 말씀은 예레미야를 구해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견고한 성읍과 쇠기둥과 놋성벽처럼 모든 고난과 역경을 견디게 하여 끝없는 고난을 살아내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어깨에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의 고통을 지고 가파른 고난의 길을 믿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처지가 딱하고 측은합니다. 예레미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호세아는 사랑을 배신하는 시대에 부름을 받아 자신의 행복을 포기한 채 하나님의 뜻을 받들었습니다. 요셉도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같은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은 말씀을 거역하였고 예언자의 소리를 귓등으로 듣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할 우상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분노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인생을 양과 염소로만 나눌 것이 아니라 양 무리 안에도 순종하는 양과 불순종하는 양이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도 그렇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동일한 역사와 전통과 제도를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가치와 사고방식과 지향을 가진 자들을 쉽게 봅니다. 더러는 이를 좌파니 우파니 하며 이념으로 나누려 하지만 저는 그런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좌·우 이념이 등장한 것은 18세기에 불과합니다. 양비론을 무기 삼아 스스로 심판을 자처하는 행위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문제는 진리에 대한 수용성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수성입니다. 문제는 진실과 정의와 평화와 생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귀 기울여 듣는 성실성입니다. 이는 자기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만무도한 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11:9). 통치자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일을 ‘반역’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유다의 모습입니다. 반역의 또 다른 뜻은 ‘나라와 겨레를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지금 우리는 후자적 반역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민족도, 역사도, 평화도, 상식도, 도덕도 반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반역자를 반역하는 일이야말로 예레미야를 읽는 그리스도인의 깊은 기도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망국노가 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멸망을 다시 확인시키십니다. “예레미야야, 너는 이런 백성을 보살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너는, 그들을 도와 달라고 나에게 호소하거나 간구하지 말아라. 그들이 재앙을 당할 때에, 네가 나에게 부르짖어도, 내가 들어주지 않겠다”(11:14 새번역). 기도를 거부하는 하나님이 가장 두렵습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주님, 반역이 애국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일상의 소소한 죄가 쌓이면서 하나님의 인애와 정의를 훼손한 탓입니다. 버리지 못한 욕망이 여전하며 하늘보다 땅을 사랑한 탓입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찬송 : 445 주 음성 외에는 https://www.youtube.com/watch?v=1DavzSNguBk
2023. 7. 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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