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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예레미야 11:17~12:6
챗 GPT는 사용자가 대화창에 텍스트를 입력하면 그에 맞춰 대화를 함께 나누는 서비스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물론 논문 작성이나 번역, 노래의 작사와 작곡, 미술 활동, 코딩 작업 등 광범위한 분야의 업무 수행까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존하는 AI(인공지능)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챗 GPT가 인류에게 유익할 것인지, 또는 해악을 끼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물론하고 그것이 상용화되면 질문을 잘하는 것이 능력이 될 것이 뻔합니다. 고가의 첨단 스마트폰을 구입하여 주야장천 통화만 한다면 기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챗 GPT 시대에 질문하는 능력이 없어서 단순한 답답형의 질문 정도에 만족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태도가 분명합니다. 예를 들자면(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양이와 개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고 질문하기보다 ‘고양이의 시각과 개의 후각에 존재하는 뇌의 인지능력이 먹이활동에 기여하는 성공률은 어떻게 다른가?’고 질문한다면 훨씬 전문적이고 세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질문하지 못하는 숙맥불변의 아이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서는 일도 부끄러웠습니다. 깨달음은 늘 늦었고 매사 남들보다 뒤처진 주변머리 없는 아이였습니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고 자랑삼을 일도 없는 평범한 아이였고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못난 아들이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주일 오후 모임에서는 목사의 설교를 평하고 질문합니다. 가끔 까칠한 질문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또 한번의 설교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반깁니다. 질문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던 제가 교우들과 청년들에게 ‘질문을 하라’고 채근합니다. 목사와 지도자에게 속지 말라고 합니다. 사실 저도 전에 없이 질문을 많이 합니다. 특히 요즘 <예레미야>를 읽으며 오늘의 교회와 정부에게 질문을 퍼붓습니다. ‘이게 교회냐?’, ‘이게 나라냐?’, ‘이러려고 대통령이 되었냐?’, ‘왜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상대에게는 가혹하냐?’, ‘그게 공정이냐?’, ‘평화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이냐?’, ‘이권 카르텔 중에 법조 카르텔보다 더한 게 있냐?’, ‘왜 사과에 인색하냐? 백성이 우습게 모이냐?’고요. ‘이런 사회를 향하여 교회는 왜 침묵하느냐?’, ‘왜 교회가 이율배반적이냐?’, ‘천국을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한다고 왜 가르치지 않느냐?’고요. 옛날 같으면, 이런 질문을 하면 불온하다고 붙잡혀 갔을지도 모릅니다. 질문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잘못입니다
예레미야는 감히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12:1 새번역) 당돌하고 까칠한 질문입니다만 살아있는 질문입니다. 죽은 자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질문도 허용하십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아르케(ἀρχή, 시작, 본질, 원인)인가’ 물었습니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물’이라고 했고,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이라고 했고, 아낙시메데스는 ‘공기’라고 했습니다. 답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입니다.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습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와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질문을 받지 않는 정부와 교회는 쇠퇴가 답입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저는 어떤 질문도 용납하시는 주님이 좋습니다. 교회와 정부에 질문이 일상으로 수용될 수 있기를 빕니다. 억압과 무지와 미신은 썩 물러날지어다.
찬송 : 461 십자가를 질 수 있나 https://www.youtube.com/watch?v=NpIiVncRPmg
2023. 7. 30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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