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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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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담은 진노의 잔
예레미야 13:1~14
천사를 마귀로 돌변하게 한 것은 교만이지만 사람을 천사로 만드는 것은 겸손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하늘의 문은 아주 큰 죄인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지만 교만한 사람은 절대 통과할 수 없을 만큼 낮습니다(찰스 스펄전). 국어사전에서는 ‘교만’을 잘난 체하고 뽐내고 건방진 태도라고 설명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깔보면서 우월감에 젖어 삽니다.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은 교만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중히 여기지 않지만,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의미있게 다루는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 가운데 가장 먼저 꼽는 죄가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나머지 여섯 가지 죄(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의 모태이자 뿌리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빠진 죄가 교만이고(9), 오늘 우리 역시 이 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베로 만든 띠를 사서 허리에 띠라’(1)고 하십니다. 예레미야가 순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 띠를 유프라테스 강가의 바위 틈에 숨기라’고 하였습니다(4). 예레미야는 말씀을 순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여러 날이 지난 다음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 띠를 가져오라’ 하십니다(6).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의 거리는 못 잡아도 왕복 1,200 Km가 넘습니다. 하루아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적어도 두 번은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를 메소포타미아의 강이 아니라 예루살렘 인근의 한 지역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만 바벨론 포로를 염두에 둔 하나님의 의지를 보아 유프라테스를 부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먼 길을 여러 차례 왕복해야 하는 예레미야는 의미 없어 보이는 이 일에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예언자의 자세란 이런 것일 겁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주장은 없고 오직 주님의 의지만 존중히 여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메소포타미아에 가서 본 띠는 이미 썩어 있었습니다(7).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졌습니다. 드디어 이런 일을 시킨 하나님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렇게 썩게 하겠다”(13:9 새번역). 특히 예루살렘의 교만을 ‘큰’으로 강조하십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오늘 강남으로 대표되는 서울의 교만을 생각해 봅니다.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거명하신 주님께서 오늘 서울 강남을 과연 어떤 시선으로 보실까요? 주님의 책망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강남만 그런 게 아닙니다. 강남처럼 살려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특히 강남의 그리스도인은 더 정신차려야 합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술에 잔뜩 취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부딪쳐서 깨지게 하고,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도 서로 부딪쳐서 깨지게 하겠다.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으며, 동정도 하지 않으며, 사정없이 멸망시킬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13:13~14). 하나님은 정치인과 종교인들을 잔뜩 취하게 하십니다. 그들로 인사불성이 되게 하여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무슨 일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하십니다. 심판을 담은 진노의 술잔입니다. 이 술잔에 취한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주님, 썩은 띠를 띠고 심판을 담은 진노의 잔을 드는 인생이 바로 저입니다.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정의와 사랑과 겸손의 은총 주시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찬송 : 양떼를 떠나서 https://www.youtube.com/watch?v=BSuNF2gnO6w
2023. 8. 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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