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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 영성의 전통 안에 '관상 기도'란 것이 있다.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도 중에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면서 다양한 신비 체험을 하고, 종국에는 신의 얼굴을 보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경험하는 희열과 행복은 이 세상의 언어로 묘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렬하다고 한다.

 

2. 개신교에서는 이런 신비 체험에 대해 '의심'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니, '관상'이란 말만 들어도 '이단 아니야?"라고 경기부터 일으키는 사람이 제법 많다. 하지만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 전통에서는 오늘날도 관상 기도의 흐름이 면면이 이어져오는 것이 사실이다.

 

3. 널리 알려진 개신교 신학자가 가톨릭이나 정교회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는 '지복직관'에 대한 방대한 책을 썼다. '지복직관"이란 '신의 얼굴을 직접 보는 가운데 맛보는 무한한 행복과 희열'을 뜻한다. 저자는 '지복직관'이야말로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구원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단언한다.

 

4. 저자의 방대한 연구에 따르면, 종교 개혁 이전에는 '지복직관' 체험이나 논의가 저명한 신학자들의 저술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십자가의 성 요한, 쿠자누스, 단테의 작품에는 지복직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등장한다. (* 개인적으로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관상 기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정확한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5. 하지만 종교 개혁가 칼뱅에 이르러 지복직관에 대한 관심이 크게 약화되었다. 칼뱅은 지복직관 체험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리 크게 강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말씀'의 중요성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이후 칼뱅의 영향으로 개신교는 '텍스트의 종교'의 길을 걷게 된다.

 

6. 그렇다고 해서 지복직관에 대한 관심이 개신교 내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영국의 청교도,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등은 여전히 지복직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국의 시인 존 던도 마찬가지다.

 

7 그렇다면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신학자들의 의견과 작품이 아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인 성경은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저자는 태초의 에덴동산에서는 신의 얼굴을 직접 보면서 친교를 나누는 것이 가능했지만, 범죄 이후 인간은 더 이상 신의 얼굴을 못보는 대신 신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신의 로고스가 성육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으며, 이 약속과 소망은 종말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듯, 신의 얼굴을 대면하며 무한한 복락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 시장성이 거의 없는 700쪽이 넘는 전문 연구서를 한 권 내면, 적자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도 의미가 있는 책들은, 누군가는 소개해야 하겠지요. 돈 벌려고 만든 책이 아니라 돈을 쓰려고 만든 책입니다. 비즈니스 논리로 보면 바보짓입니다. 그러나 이런 바보짓거리가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발행인 김요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