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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예레미야 14:1~12
기도는 떼쓰듯 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불문곡직하고 자기 요구만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어린 아기가 울음으로 자기 의사를 표시하거나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아 불편할 때 칭얼대는 것처럼, 아니면 다급한 상황에 처한 경우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때를 가리지 않고 그런 식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에게서 기도의 방법을 배웁니다. 기도는 단순히 내 요구를 들어 달라고 하나님을 조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어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음을 예레미아에게서 배웁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까?”(14:8 새번역)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성품, 곧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성품, 그리고 무한한 능력과 주권적인 은혜에 의지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라 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크신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그 백성을 용서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14:7 새번역).
하지만 하나님은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들의 죄악을 징벌하겠다”(14:10 b 새번역)고 하십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매우 위중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기억하는 분이 아니라 죄를 기억하지 않는 분이십니다(31:34, 사 43:25, 히 8:12). 하나님은 죄악을 징벌하는 분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십니다(시 103:8~12, 시 130:4).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그 긍휼하심을 근거로 기도합니다. 예레미야의 기도 억양이 높아집니다.
“그래도 주님은 우리들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마십시오”(14:9 새번역).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금식하며 하는 호소도 받지 않을 것이며, 제물을 바쳐도 거절할 것이며 오히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 그들을 멸하겠다’(12)고 여전히 분개하십니다. 신앙이란, 특히 심판과 멸망의 좌표는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심판 사이에 있습니다. 예언자는 그 사이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이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14:11 새번역)고 분부하십니다. ‘그래도’ 기도하는 존재가 예언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반역에 분노하십니다. 금식과 제사로도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심판 의지가 부딪히는 자리, 그 저리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붙잡는 자가 바로 예언자입니다.
시인 김승희는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에서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어떤 일이 있더라도/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예언자란 ‘그래도’를 붙잡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붙잡는 사람입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의 분노와 심판 의지를 모르지 않습니다. 저희가 주님 대신 바알과 맘몬을 섬긴 탓입니다. 그래도 이 민족과 이 교회를 버리지 말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송 : 279 인애하신 구세주여 https://www.youtube.com/watch?v=vwfxMylwtZI
2023. 8. 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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