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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행동
예레미야 16:1~13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였습니다. 예언자 자신이 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 전하였습니다. 말씀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예언자에게는 없습니다. 들은 말씀을 오직 전하는 책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가끔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특별한 삶을 요구하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였던 호세아는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 1:2)는 명령을 받습니다. 예언자에게도 자기 삶이 있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이유로 개인적 삶과 행복권을 포기하여야 했습니다. 예언자 직분이 참 딱하고 슬픕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멜과 결혼하였습니다. 고멜이 아들과 딸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이 이름을 정해주셨습니다. 이스르엘(하나님이 흩으신다), 로루하마(자비를 받지 못한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지었습니다. 게다가 고멜이 가정을 뛰쳐나가자 하나님은 몸값을 치르고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호 3:1~2). 하나님의 메신저로 살아야 하는 예언자의 삶이 쉽지 않습니다. 함부로 나설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요구하는 이런 행동을 상징 행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도 상징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너는 이곳에서 아내를 맞거나, 아들이나 딸을 낳거나, 하지 말아라”(16:2 새번역).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가정 조차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 자체가 유다의 참상을 대변합니다. 슬픔은 위로할 수 없고 더 이상 기쁨은 없습니다. “너는 초상집에 가지 말아라. 가서 곡하지도 말고, 유가족을 위로하여 주지도 말아라”(16:5 새번역). “너는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먹고 마시는 잔칫집에도 들어가지 말아라!”(16:8 새번역) 심판의 시간에는 슬픔의 자리에 함께 울어줄 사람이 없고, 즐거움과 환대의 시간에 함께 기뻐할 사람이 사라집니다. 이웃의 슬픔에 위로 하지 않고 이웃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않는 세상이야말로 종말 상황입니다. 공동체성은 사라지고 각자도생을 도모하지만 심판을 면할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다 백성은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재앙을 모두 우리에게 선포하시는가?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짓고,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16:10 새번역)고 예레미야에게 묻습니다. 마치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입니다. 이런 질문은 그 자체로 종말 상황임을 반증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쫓아 율법을 백안시하였던 조상들보다 더 악한 죄에 빠져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한 유다 백성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환대하는 선민의 기본기를 버리므로 율법의 정신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그러고도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니 한심하고 안타깝습니다.
그 시대 유다 백성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하나님의 나라와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을 동일시하였고, 세상 복락을 은총의 결과로 오해하였습니다. 공동체에 정의가 사라지고 인격에 담긴 진실이 매도되고 평화가 위협받고 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정의와 진실의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외면하면서도 죽어서 갈 천국을 그리워합니다. 이런 시대를 향하여 주님은 엄히 경고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다시는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16:13 새번역)
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우리 시대에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들을 예민한 감각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주님 안에서만 희망을 잇겠습니다.
찬송 : 376 나그네와 같은 내가 https://www.youtube.com/watch?v=2J__CcBnTm4
2023. 8. 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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