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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신앙과 체제의 종교
예레미야 19:14~20:6
체제의 보호를 받으며 그 안에서 보장된 신분을 유지하는 지식인은 체제의 질서에 메이지 않고 그 질서를 무시하는 자유 지식인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온갖 말로 자유인을 험담하며 체제의 힘으로 자유 지식인을 억압합니다. 체제의 종교 역시 그렇습니다. 제도와 형식으로 굳어진 종교는 체제 밖에서 들리는 자유혼의 외침이 거북하고 불편합니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야유하고 회유하고 협박하다가 나중에는 물리적 힘을 사용하여 핍박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무수히 많이 있던 사실이고 지금도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체제에 갇힌 종교인들은 누구든지 자유혼을 가진 예언자의 외침에 경기하기 마련입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에게서 돌아와 성전 뜰에 서서 심판과 재앙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이 백성이 고집을 부려, 나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내가 이미 선포한 그 모든 재앙을, 이 도성과 거기에 딸린 모든 성읍 위에 내리겠다”(19:15 새번역). 안전하다고 여겼던 성전부터 재앙이 임한다는 충격적인 메시지, 곧 ‘성전 신앙의 붕괴’, 곧 성전 모독입니다. 그러자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습니다. 성전에 터하여 종교 권력을 행사해오던 이들로서는 예레미야의 도발적인 선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임멜의 아들로서, 제사장이면서 주님의 성전에서 총감독으로 일하는 바스훌이, 이렇게 예언하는 예레미야의 모든 말을 듣고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그에게 차꼬를 채워서 주님의 성전 위쪽 '베냐민 대문' 근처에다가 가두었다”(19:1~2) 새번역). 그동안 예레미야의 언행이 불편하고 괘씸하기는 하였지만, 꾹 참아왔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메시지를 한결같이 선포하는 예레미야가 고을 리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미워하고 저주하고 당장 죽이고 싶었지만 일말의 양심이 있었고, 주변의 눈총도 살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계속되는 도발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전과 갈등을 빚으신 주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성전만 할 수 있는 속죄 기능을 수행하셨습니다. 주님은 돌아다니는 성전이 되어 죄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병을 고치는 일도 같은 맥락입니다. 게다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며 성전을 자기 육체와 동일시하셨습니다(요 2:21). 명백한 성전 모독입니다. 주님은 성전에 기대어 명예와 권력을 누려온 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기득권자들과 충돌을 자처하셨습니다. 성전 체제를 지탱해온 이들의 반발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성전 신앙의 붕괴를 선포하는 예레미야와 자기 몸을 성전으로 삼으시는 주님과 절묘하게 교차되는 시점입니다.
계속되는 예레미야의 도발적인 메시지에 성전의 총감독 직책을 맡은 제사장 바스훌이 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차꼬를 채워 가두었습니다. 그가 세운 질서는 부패한 성전 체제를 위한 것일 뿐 결국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질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들이 지금도 상당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체제의 종교로 순치되어 하늘의 자유혼을 망각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 성찰할 때입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성전은 안전을 보장하는 곳이었지만 무너졌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희망을 주는 곳이 교회인데 주님은 세상 심판의 원인을 교회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무너져야 할 체제에 기대어 살지 않는 자유혼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찬송 : 212 겸손히 주를 섬길 때 https://www.youtube.com/watch?v=oLfHrRJQ1hM
2023. 8. 1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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