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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고백
예레미야 20:7~18
예레미야의 고백을 읽고 있자니 기가 막힙니다. 이런 심정이 예언자의 숙명이라면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습니다. 헌신을 함부로 고백하고 그 길을 우쭐거리며 걸어온 지난날이 부끄럽고 남은 삶이 두렵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20:7),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20:8).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20:10b).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20:17~18 새번역).
그래서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서 솟구치는 열정이 그의 의지를 무너뜨립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20:9).
예언자는 반복하여 탄식합니다. 그는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실패해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20:11).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고통과 비탄의 신음이 불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도리어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요란한 전자 악기에 뒤섞인 큰소리의 찬양이야말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불신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불안을 위장하는 일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신앙의 형식을 빌려 불신앙을 표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레미야의 탄식은 자신이 출생을 저주하는 표현에서 극을 이룹니다.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20:17~18)
태어난 것을 저주할 정도로 비통한 예레미야의 삶은 심판받는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런 중에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의인의 고난과 처절한 삶에서 저는 힘 있는 믿음의 힘겨운 모습을 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하는 표가 아닙니다. 고통의 현실을 징계로 이해할 필요도 없고 부끄러워할 이유도 아닙니다. 고난과 탄식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을 따르는 예언자적 영성의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으로 예언자가 되었지만, 기계적인 순종이 아니라 자유혼의 소유자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면서도 고백과 교제로 이어지는 예레미야의 삶은 오늘 심판의 상황에서도 심판이 집행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복락에 겨워하는 이들은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을 천천히 읽기를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승리와 영광의 예배 자리에는 안타깝게도 예레미야의 탄식과 고통이 스며들 자리가 없습니다. 기쁨과 영광만 강조되고 탄식이 사라진 교회, 교회가 가르치는 지향과 세속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은 시대를 가슴 아파합니다.
찬송 : 214 나 주의 도움 받고자 https://www.youtube.com/watch?v=MqnxVuKPoro
2023. 8. 1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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