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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예레미야 22:10~19
저는 이 땅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하는 분들이 <예레미야>처럼 정치와 국제정세가 그 배경이 된 성경을 읽으면서 교인들에게 왜 현실 정치와 관련하여 교훈하기를 주저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현실의 지표로 삼는 일에 익숙한 이들이 왜 사회적이고 정치적 적용에는 머뭇거리는 것입니까? 정치평론가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정치계에도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에 기대어 신선한 가르침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 요즘처럼 사회가 이념으로 나누어져 갑론을박할 때 교회가 제3의 길을 제시하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저는 ‘유신’ 후와 ‘5공’ 때에 청년기를 지냈습니다. 일부 교회가 ‘유신 반대’를 천명하며 ‘독재 타도’를 소리쳤습니다. 신문에 반정부 광고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교회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이유로 ‘교회는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며 침묵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독재자를 지지하는 광고를 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것이 정치참여입니다. 그때 교회는 모두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으면서도 독재를 지지하는 이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순수하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때 이미 한국교회는 중증이었습니다. 저는 어처구니없게도 이십 대의 소중한 시절에 <정치신학의 이론과 실제>,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류의 책을 성경 다음으로 읽으며 영혼을 더렵혔고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였습니다. 좋은 선생을 찾지 못한 때였습니다.
정치를 잘한다는 게 어떤 걸까요? 요즘처럼 정치는 없고 통치만 하려는 시대에 정치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정치란 뒷골목의 깡패가 자기 패거리를 끌고 다니며 세를 과시하는 게 아닙니다. 내 편 네 편을 갈라놓고 상대편을 면박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양아치의 패싸움입니다. 시민의 다양한 욕구를 조정하여 먼저 할 일과 필요한 일을 정하고 누구라도 낙오하지 않도록 보살피며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의 희망을 제사하는 일, 다음 세대가 안전하고 자랑스러운 세상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 정치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이 나라 정부는 자신이 정의의 사도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구라도 겁박하고 위협합니다. 제 잘못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남의 허물만 찾습니다. 한마디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식이고, 제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 티를 나무라는 꼴입니다.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나무라면 가짜 뉴스니 괴담이니 하면서 윽박지릅니다. 민족 간에 이견이 많을 때 필요한 것이 대화이고 국제 질서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달릴 때 절실한 게 외교입니다. 좋은 시절에는 아무 일 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때에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사달이 납니다. 민족 문제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다양한 사회 계층의 목소리도 시끄럽습니다. 국제사회가 이익을 따라 질서가 개편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자기 말도 하지만 다른 이의 말도 들어야 합니다. 더 좋은 생각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정치적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22:16) 정치,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즐거움이지만 땅의 통치는 언제나 불공평합니다. 이 땅에서 자행되는 깡패 정치, 반칙 정치가 신사 정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찬송 : 350 우리들이 싸울 것은 https://www.youtube.com/watch?v=F5h5fJNT7yo
2023. 8. 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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