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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노마드
예레미야 23:1~8
“내 목장의 양 떼를 죽이고 흩어 버린 목자들아, 너희는 저주를 받아라. 나 주의 말이다”(23:1). 속이 뜨끔한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유다 왕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다 왕은 백성을 돌보는 목자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을 흩어지게 하고 돌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에 대하여 벌을 하시겠다고 천명하십니다(2). 저는 30년 목양길을 걸은 작은 목자로서 말씀 앞에 당혹해집니다. 목자란 양 떼를 살리라고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양 떼의 형편을 잘 살펴 적절한 조치와 필요한 바를 공급하여야 합니다. 아프면 싸매주고, 주렸으면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갈하면 마실 물을 준비해야 하며, 도적과 늑대가 기웃거리면 쫓아야 하고, 길을 잃었으면 한밤중에라도 찾아나서야 합니다. 목자란 그런 존재입니다. 어렸을 때 집에서 젖염소를 기른 적이 있는데 한겨울에 새끼를 낳으면 따뜻한 아랫목을 새끼 염소에게 양보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기>에 있을 때 제 부친은 ‘젖염소 한 마리만 있으면 누구도 굶어 죽지 않는다’며 북한에 ‘평화의 젖염소보내기 운동’을 펼쳤습니다. 1998년부터 10년 동안 1만 마리 젖염소를 보내자는 취지였습니다. 영하 30도의 추위에 염소들과 한데서 끌어안고 잠을 자고, 전염병이라도 돌면 몇 날 밤잠을 설치는가 하면, 동네 수의사가 없으면 가까운 도시 병원에 달려가서 의사를 채근해 데려오곤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목자의 심정을 정말 잘 배웠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변명도 해봅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 전통에서 목자와 양을 구분하는 일이 합당한가, 의문을 제기합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엄격히 구분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전통을 배격하여 ‘만인제사장론’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운동이 종교개혁입니다. 개신교에는 ‘평신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이란 돌봄의 대상으로서 늘 연약하고 피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입니까? 목자로 지칭되는 목사는 언제나 무엇이든 공급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아는 능력자이자 하나님의 대리자인가요? 헌신보다 특권이 강조되는 듯한 목회자 관에 수정이 필요하지는 않을까요? 오늘 이 땅의 교회가 갖는 문제는 양과 목자를 구분하였기 때문에 찾아온 귀결이 아닙니까? 누가 목자이고 누가 양입니까? 왜 이 땅의 목회자에게서 양내 대신 향내가 나는 지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자의 잘못으로 흩어진 양들을 한데 모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 내가 쫓아냈던 모든 나라에서 모아서, 다시 그들이 살던 목장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질 것이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참다운 목자들을 세워 줄 것이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떠는 일이 없을 것이며, 하나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23:3~4). 하나님이 짓궂으십니다. 양 떼가 흩어지기 전에 좋은 목자를 보내셨으면 될 텐데 왜 못된 목자의 잘못에 대하여 양들이 죽을 고생을 다 한 후에야 구원하시는 것일까요?
구원은 심판 다음에 옵니다. 우리는 심판이 있기 전에 구원이 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희망은 절망 다음의 순서입니다. 개인적 구원이나 사회적 구원도 동일합니다.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좋은 목자’(5)가 등장할 날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지금은 성찰하고 인내할 시간입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하늘 백성 위에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저희는 정처없는 노마드의 삶보다 안정된 정착인의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이런 생각이 주님의 뜻을 거스리게 합니다. 저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주님을 목자로 삼은 양이 되고 싶습니다.
찬송 : 570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https://www.youtube.com/watch?v=QfIWuZlHLag
2023. 8. 20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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