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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삶과 예술

가족글방 Navi Choi............... 조회 수 41 추천 수 0 2023.08.22 20: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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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삶과 예술
영국 소설가 위다 Ouida, 1839~1908 의 『플랜더스의 개』1872 에서 주인공 네로는 루벤스의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를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하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 네로는 그토록 갈망하던 그림 앞에서 행복해하며 숨을 거둔다. 고흐는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 앞에 ‘두 주간의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내 삶에서 10년의 세월을 가져가도 난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림 한 점 감상하는 일이 죽음과 맞바꿀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인지의 여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네로나 고흐의 진심을 애써 폄훼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훨씬 무가치한 것에 목숨을 걸기도 하니까.
제분업자의 아들, 화가가 되다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1606년 레이덴의 풍차 제분업자의 아홉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레이덴은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 다음가는 도시였다. 많은 청교도들이 플랑드르에서 유입되었고 섬유산업이 번창하였다. 레이덴은 계속 팽창하여 1622년에는 인구가 4만 5천 명을 넘어섰고 도시 방어를 위해 방파제와 토성을 쌓았는데 렘브란트 아버지의 제분소는 토성 안에 있었다. 집안은 비교적 부유하였고 형제들은 상인이 되었다.
렘브란트는 1620년에 레이덴대학에 진학했지만 공부를 포기하고 화가의 길에 전념하였다. 스바넨뷔르흐Jacob Isaacszoon van Swanenburgh, 1571~1638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다가 암스테르담으로 가 역사화가인 피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 1583~1633의 도제가 되었다. 1625년에는 레이덴으로 돌아와 얀 리벤스Jan Lievens, 1607~1674와 공동으로 화실을 열었다. 두 사람은 아주 좋은 협력자이자 경쟁자였다. 이 무렵, 총독의 비서이자 미술전문가이기도 한 콘스탄테인 호이겐스Constantijn Huygens, 1596~1687가 이들의 그림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호이겐스는 렘브란트의 <은화 30을 돌려주는 유다>1629에 큰 관심을 보였다. 덕분에 이 그림은 수없이 복제되었다. 이 그림에 대하여 호이겐스는 자서전에 ‘유다가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서 인상을 받았다’고 썼다. 이 그림은 그동안 유다에 대하여 가졌던 선입관을 바꾸어놓았다. 악마의 얼굴을 한 배신자로서 결코 회개할 수 없는 인간형인 유다의 고정관념을 깨트린 것이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에스파냐의 시인 케베도Francisco de Quevedo, 1580~1645 는 <꿈>1627 에서 “내가 유일한 유다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스도 사후, 나보다 훨씬 지독한 ‘유다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났는지 다들 알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팔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기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며 지옥에 있는 유다의 입을 빌려 성직매매와 온갖 부패에 연루된 제도교회를 비판하였다. ‘로마인’ 빌라도에게 쏠리는 예수 처형의 책임을 ‘유대인’ 유다에게 덮어씌우려는 종교 권력의 속내를 고발한 것 같기도 하고, 유대인에 대하여 갖는 인종차별을 의식한 작품 같아 보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종교개혁운동의 물결 덕분이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이 작품으로 유명세를 떨쳤고 케베도는 체포되어 수도원에 감금되었으니 같은 주장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이 인간사회의 현실임을 새삼 느낀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렘브란트는 1631년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아주 짧은 기간에 가장 인기 있는 화가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여자 예언자 안나>1631, <튈프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 등을 그렸다. 그리고 1634년에 사스키아Saskia Uylenburgh, 1612~1642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프리슬란트시 시장의 딸이자 렘브란트의 동업자인 미술상 헨드릭 판 윌렌보르흐의 조카였다. 결혼한 사스키아는 렘브란트 미술의 좋은 모델이 되어 <플로라>1634, <아르테미시아>1634 등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예술가로 성공한 렘브란트는 부유하여졌다. 훌륭한 저택을 사고 호화로운 가구와 진귀한 골동품을 수집하였다. 렘브란트 부부가 탕자와 매춘부로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에 등장한 렘브란트와 사스키아>1635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성공은 슬픔과 함께 찾아왔다. 1635년, 장남 롬베르투스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죽고 만다. 이 무렵에 그린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에는 아버지의 비통이 스며있는 듯하다. 이후에도 렘브란트의 슬픔은 이어진다. 1638년에는 장녀가 태어난 지 3주 만에 세상을 떠났고, 1640년에는 둘째 딸도 세상을 떠났다.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던 시대이기는 하였지만 렘브란트와 사스키아의 상심은 매우 컸다. 1641년 9월에 둘째 아들 티투스가 태어났다. 그러나 이듬해에 사스키아는 병약한 젖먹이 아들과 위대한 미술가 남편만을 남겨두고 30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스키아는 명문가의 딸이기는 하였지만 12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17살에는 아버지마저 여의고 삼촌의 집에 들어갔다. 삼촌은 암스테르담에서 잘나가는 미술상이었고 마침 레이덴에서 올라온 렘브란트의 진가를 발견하고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게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연이 닿아 부부가 되었다. 결혼생활 8년, 그녀의 행복은 너무 짧았다. 이렇게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렘브란트의 몰락도 시작된다.
성공과 유명세에 가려진 렘브란트의 슬픈 삶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왜 하나님은 렘브란트에게 루벤스 같은 고상한 품위와 높은 명예, 그리고 달콤한 행복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일까? 진주를 품고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 하는 조개의 숙명 같은 것이 그에게 있었더라도 그것을 감내하는 강인함도 주셔야 하지 않았을까?
렘브란트의 시련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난 후 렘브란트의 삶은 생기를 잃었다. 돌도 되지 않은 아들 티투스를 남기고 떠난 아내를 대신하여 렘브란트는 헤르트헤 디르크Geertge Dircx라는 미망인을 보모 겸 가정부로 들인다. <성 가족>1645에서 자신의 어린 아들 티투스를 보살피는 헤르트헤를 작품 속 마리아의 모델로 삼기도 하였다. 헤르트헤가 단순한 가정부만은 아닐 수 있음을 애써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헤르트헤가 사스키아의 패물을 자기 마음대로 저당 잡히는 등 렘브란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잦았던 모양이다. 그러던 1649년 렘브란트는 헤르트헤로부터 혼인 불이행으로 고소를 당한다. 사스키아가 ‘만일 남편이 재혼할 경우 자신의 재산 상속자 자격을 상실한다’는 유언을 남긴 바 있어 렘브란트로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처지였다. 재판에서 진 렘브란트는 헤르트헤에게 해마다 보상금을 주어야 했는데 이 역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 자녀를 잃고 아내마저 먼저 보내고 빚까지 진 렘브란트로서는 또 다른 짐을 져야 하는 현실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미 그려놓은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주문도 현저하게 줄었다.
주홍글씨의 여인
이 무렵 렘브란트의 집안일을 거들어주는 헨드리케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 1626~1663라는 여인이 있었다. 헨드리케는 헤르트헤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 렘브란트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1654년에는 렘브란트와의 사이에 딸 코넬리아를 낳아 사실상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지만 간음한 여인이라는 불명예를 평생 감수해야 했다. 그런 중에서도 헨드리케는 티투스를 화가로 키웠는가 하면 1656년에 파산하여 저택과 미술품이 경매에 붙여져 빈털터리가 된 렘브란트를 위하여 스스로 미술상을 차려 빚을 감는 등 혼신의 노력을 다해 렘브란트의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일까. 헨드리케의 고향 브레드보르트 Breadevoort에는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도 있다고 한다.
그러던 1663년, 불평 없이 헌신하던 헨드리케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렘브란트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그런데 이때 그의 손을 통하여 명작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특히 헨드리케를 모델로 그린 작품을 통하여 자신들의 겪은 슬픔과 한계를 항변하며 상처받았을 아내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듯하다. 부적절한 관계로 왕비가 된 <목욕하는 밧세바>1654에서는 법정 출석 통지서를 받아든 헨드리케의 마음을 그렸고, 고흐가 극찬할 정도로 아름다운 <유대인 신부>1667에서는 결혼의 아름다움과 믿음의 신실성을 그렸다. 고대 로마의 귀족으로서 순결한 뜻을 따라 행동하므로 로마공화정을 촉발시킨 영웅 <루크레티아의 자살>1666을 통하여 자신을 위하여 헌신한 헨드리케에게 사의를 표하였다. 로마신화에서 결혼과 가정을 관장하는 신인 <주노> 1664~5에서는 세속의 관습을 초월한 사랑의 관계를 숨기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것이 죄가 되는 시대를 향한 돌직구이자 아내를 향한 최고의 사랑 표현인 셈이다. 헨드리케 사후에 그려진 이 그림들을 통하여 렘브란트는 비록 법적인 부부는 아니었지만 세속의 관념을 뛰어넘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아내에게 바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처음에는 하녀로 고용되었지만 그림의 모델이 되고, 뒤이어 인생의 반려가 된 헨드리케, 하지만 당시는 종교의 엄숙성이 강조되던 시대였고 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부부인 이들은 교회에 여러 차례 소환되어 강한 문책과 경고를 받고 심지어 수찬도 정지되었다.
렘브란트의 슬픔은 계속되었다. 1668년 2월 아들 티투스가 은세공업자의 딸 막달레나와 결혼하였으나 9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5월에 막달레나는 유복녀를 낳았다. 렘브란트는 손녀의 대부가 되어 생활하다가 그해 10월 4일, 63세로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헨드리케와 티투스 옆에 비석도 없이 묻힌다. 그의 부고는 뉴스가 되지 못했다. 이미 그는 잊혀진 존재였다. 미국의 역사가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lem van Loon, 1882~1944은 『렘브란트』2003, 들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희미한 목소리로 내게 사스키아 곁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무덤을 오래전에 팔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둘째 아내 헨드리케가 세상을 떴을 때, 대단히 빈궁한 처지에 몰려 있던 그는 장지 구입비를 마련하느라고 구舊 교회에 있던 가족 묘지를 팔았던 것이다.” 만년의 렘브란트의 형편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렘브란트의 부활
렘브란트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 프랑스에서였다. 회화와 드로잉, 에칭 등 그의 많은 작품들이 이때 발견되었고 유럽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광스런 황금시대의 우상으로 렘브란트 영웅 만들기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 실수도 많았고 허점도 컸다. 렘브란트의 인생에 있어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헨드리케이다. 렘브란트에게 헨드리케가 없었다면 말년의 명작들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경제개념이 무딘 렘브란트 때문에 큰 고생을 해야 했지만 헨드리케는 렘브란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우리는 그녀가 모델로 등장하는 작품들에서 렘브란트의 속심을 읽으며 역사와 성경을 대면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딸 코넬리아는 1670년에 화가와 결혼하여 1673년에 아들을 낳고 렘브란트라고 이름을 붙였다.
젊은 시절의 성공을 오래 끌지 못했던 화가, 그래서 더 깊은 영감의 작품이 가능했다는 역설도 일리는 있다. 그래서 드는 우문이 하나 있다. 왜 하나님은 루벤스와 렘브란트를 다르게 대접하셨을까? 인생을 대하는 방법의 다양성이 각 사람에게 역동하는 힘이 되기를 바라셨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하나님이 현답하실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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